삼국지 기행/삼국지 기행

폐허뿐인 업성유지(邺城遺址)

佳人 2013. 1. 12. 08:00

누구?

모두가 간웅이라고 욕할 때 욕이 배 째고 들어오느냐고 버티며 혼자 영웅이라는 자부심으로

사셨던 조조 아니십니까?

한 때 여기서 황제보다 더 황제 같은 삶을 살았던 조조 말입니다.

조조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실 동탁에 볼모로 잡혀 살다 장안에서 뤄양으로 유기견처럼 도망 온 황제라는 헌제를

어느 군벌도 나서서 돕지 않았습니다.

동탁 토벌에도 사실 나서지 않으려 했지요.

항건적을 토벌한다고 군사를 키운 덕분에 황제보다 더 큰 힘을 가지고 이제 황제의 꿈을 몰래 키우고 있었나 봅니다.

 

그러나 조조는 굶주려 허기에 지친 헌제와 그를 따라온 모든 신하를 따뜻하게 맞이하고 따끈한 닭국물을 대접해

허기와 추위를 가시게 한 조조를 왜 간웅이라 욕을 합니까?

그때 헌제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바로 따끈한 국물이 있는 음식이었을 겁니다.

조조의 그런 배려는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그때 뤄양으로 돌아오는 헌제의 모습을 佳人이 옆에서 분명히 지켜보았습니다.

그 모습은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소나기를 맞은 상갓집 개보다도 못한 모습이었습니다.

 

동탁이 뤄양을 떠나며 모두 불 질러 이슬마저 피할 수 없는 곳이었던 뤄양...

바로 위의 벽화사진을 통하여 우리는 황제가 뤄양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런 곳에 황제를 모신다는 일은 조조에게는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중원에는 여러 군벌이 있었지만, 모두 동탁 잔당의 후환이 두려워 황제의 뤄양 귀환을 애써 외면하며

모른 체했다는 점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이에 오직 한 사람, 조조만이 폐허가 된 옛 황궁으로 한걸음에 달려왔고 그 안에서 황제를 영접했으며

이때 가장 시급한 것이 무엇인가 간파하고 따뜻한 닭국물을 준비해 허기와 추위를 면하게 도왔습니다. 

그리고 조조는 자기가 거처했던 쉬창을 헌제를 위해 아무 조건 없이 내어준 조 서방이 아니겠어요?

간웅이니 뭐니 하며 너무 조조만 나무라지 맙시다.

세상에 조 서방만 한 사람 흔치 않습니다.

 

이제 업성유지 안으로 들어갑니다.

우선 제일 눈에 띄는 게 문 너머로 보이는 조조의 석상입니다.

사실 조 서방 석상 외에는 아무도 없네요.

너무 이른 시간인가요?

우리 외에는 구경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보이지 않습니다.

 

어떻습니까?

조 서방이 간웅으로 보입니까?

아니면 한 시대를 풍미한 풍운의 영웅으로 보입니까.

 

세상은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영웅이라 하고 또 간웅이라고도 합니다.

왼쪽에 서면 좌파요, 오른쪽에 서면 우파가 되는 게 세상의 이치잖아요.

업성유지라는 곳은 남은 유적은 별로 없고 그때로 돌아간 상상 속의 여행이어야 할 것 같습니다.

위의 사진은 바로 삼대가 있었다는 옛터로 올라가는 입구입니다.

삼대승경(三臺勝境)이라고 썼나요?

웃기는 이야기죠?

터만 그렇다는 말입니다.

다만, 입구에 만든 두 개의 오석에 새긴 업성과 임장이라는 글이 여기가 한 때는

어마어마했던 곳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위의 사진은 제일 먼저 이 도시를 만든 제나라 환공이 업성을 만들었다는 의미의 제환공건업(齊桓公建邺)이라는

벽에 새긴 조각입니다.

오른쪽 환공 뒤에 선 사람이 그럼 관포지교에 나오는 관중이 아닌가요?

관중이 당시 환공을 도와 선정을 베풀도록 했잖아요.

 

이곳은 한국사람에게는 볼 게 별로 없는 곳이라 쉽게 접근하기가 어려워 아주 자세히 사진으로

보여 드릴 예정입니다.

뭐 중국 사람도 없어 아침 일찍 우리가 독채로 전세 내고 보고 있습니다.

사실 찾아가셔도 관광객 대부분은 실망만 하실 것 같습니다.

물론, 佳人은 이런 이야기 속의 여행을 즐기니까 아주 만족하고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입구로 들어서면 오른쪽 벽에는 옛날, 이 동네에서 있었던 모습을 만들어 놓았네요.

 

위풍당당!!!

오늘 조조는 정치가의 모습이 아니고 칼을 든 군사가로서의 모습입니다.

이곳에 조조는 당시로는 첨단기술과 최고급 자재를 사용해 누대를 만들었을 겁니다.

황제 아래 승상으로 있다가 조조는 싫다고 난리 부렸지만, 마음이 여린 조조는 황제의 간곡한 청을

거절할 수 없어 위왕으로 승진하며 일인자보다 더 일인자 같은 이인자로 살았던 곳이 바로 여기가 아닐까요?

 

일부 사서에서 조조의 근거지 업성이 당시 한 헌제가 머물었던 도읍 쉬창보다 더 크고 번성했다고

기록했을 정도니 가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요?

여기서 살아보니 이제 황제연습을 하고 싶었나 봅니다.

조조를 그리고 위무웅풍(魏武雄風)이라고 쓴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가 조서방이 폼 잡았던 곳이라 역시 조조 찬양 뿐이네요.

 

당시 동작대를 중심으로 양쪽으로는 구름 다리 두 개를 연결한 빙정대와 금봉대라는

삼대를 만들던 모습을 그렸습니다.

그러나 그 화려함도 모두 꿈처럼, 구름처럼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네요.

어찌 덧없는 게 유적뿐이겠습니까?

세월은 이렇게 조조의 세상을 황토먼지 풀풀 거리는 옥수수밭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어디 사라지는 게 꿈뿐이겠어요?

세월은 모든 것을 옛날 그 모습으로 돌리는 중입니다.

 

누대로 오르는 계단은 마치 그 옛날로 한 발자국씩 다가서는 느낌입니다.

과거로의 여행...

이게 이런 곳을 구경하는 맛이 아니겠어요?

볼 게 없다고 하셨나요?

佳人은 이런 곳이 더 흥분됩니다.

왜?

혼자만의 상상 속으로 들어갈 수 있으니까요.

 

저 위에서 조조가 佳人을 바라보고 빙그레 미소 지을 것 같습니다.

아시죠?

여행만이 주는 그런 느낌 있잖아요.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업성유적지 남쪽으로 5km 정도 떨어진 동네 한가운데 2천여 년이나 되는 아주 오래된

천하제일백(天下第一柏)이라는 측백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고 합니다.

중국에서는 천 년 넘는 나무는 사실 무척 흔한 나무입니다.

조조가 예전에 이곳에서 군사를 훈련시킬 때 말을 묶었다는 고사가 전해져오는 천년고백(千年古柏)이라는군요.

나무도 조조의 말을 묶었다 해서 또 유명세를 타네요.

뭐... 한중에 가면 장비의 말이 물을 먹었다는 음마지라고 꾸며놓은 곳도 있던걸요.

 

계단을 올라가면 그 뒤에 비랑이 있어 많은 문인이나 유명인사가 이곳을 방문해 조조를 찬양하는

글을 적은 비석이 있습니다.

정자로 써도 佳人은 모르는데 저렇게 어렵게 쓰면 읽으라는 말입니까?

읽는다고 세상이 변할 게 없으니...

 

설마 조서방이 사용하던 세숫대야라고는 하지 않겠지요?

무척 오래된 청동 솥으로 점차 부식이 심해 자연으로 돌아가는 중인가 봅니다.

제법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솥으로 보이는데 이렇게 함부로 보관하나요?

 

조조가 계획한 업성이란 옛날의 계획도시는 후일 베이징이나 뤄양, 장안 등의 도시 건설뿐만 아니라

일본의 궁전 건설에까지 영향을 줄 만큼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다고 합니다.

관도대전에 승리한 조조는 이곳 업성을 차지한 후 당시로는 최고의 자재를 실어와 업성을 새로운 도읍으로

삼기 위해 원가 생각하지 않고 재료 팍팍 넣어 신도시 건설에 들어갔을 겁니다.

 

황제란 허울뿐인 황제지 사실, 조조는 황제보다 더 폼나게 살았습니다.

왜 황제 자리를 선양 받아 그 자리에 오르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흥! 황제? 그게 뭔데! 지금이 황제보다 더 좋은 데 뭐하러 골치 아픈 황제를 해~" 라고 했을지 모릅니다.

오히려 조조의 생각이 탁월한 생각인지 모릅니다.

 

사실, 이곳에서 조조는 18년간이나 살았을 겁니다.

쉬창의 황제가 불편할까 봐 쉬창에 가지 않고 업성인 이곳에서 말입니다.

여기가 조조에게는 인생의 황금기를 보낸 곳이 분명합니다.

 

이제 누각이 있었다는 꼭대기로 올라갑니다.

물론, 지금은 아무것도 없고 마치 무당집처럼 꾸민 사당과 건안 문학의 태두답게 건안칠자를 모셔놓은 사당과

그때 지었다는 글로 도배한 공간만이 있습니다.

 

위를 올려다보니 금방이라도 조조가 佳人의 방문을 반가워해 맨발로 뛰어 내려와 맞이할 것 같습니다.

왜?

조조는 늘 현자를 극진히 대접했던 사람이 아니겠어요?

그렇다고 佳人이 현자는 아니지요.

맨발로 뛰어나와 현인을 맞이한다는 적각영현(赤脚迎賢)이 아니고 빠떼루 받는 모습인가요?

 

위의 사진은 조조가 동작대 위에서 문인을 불러다 대연회를 열어 한판 걸지게 놀고 있는 모습입니다.

놀고 자빠지지는 않고 서 있군요.

이렇게 인생을 즐겁게 노래하고 많은 문인과 어울리다 보니 건안 문학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문학이

탄생하게 되었을 겁니다.

지금 제일 왼쪽에서 춤을 추며 노래하는 자가 바로 조조의 아들 조식으로 이날 동작대부라는 시를 지어

조조에게 바쳤다 합니다.

천하의 풍류객 조조를 다시 생각해 봅니다.

 

전각은 우뚝 치솟아 있고 (建高門之嵯峨兮)
두 개의 대궐은 푸른 하늘 위로 떠오른 듯하구나. (浮雙闕平太情)
화려한 궁궐 한복판에 서서 바라보니 (立中天之華觀兮)
구름다리가 서쪽까지 이어졌구나. (連飛閣平西城)
궁궐을 끼고 도는 장하(漳河)는 끝도 없이 이어져 흐르고(臨仰水之長流兮)
저 멀리 과수원에 알차게 여문 과일을 바라본다. (望園果之滋營)

… 조식(曹植) <동작대부(銅雀臺賦)>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