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이야기가 있는 검문관
제갈량이 출사표를 쓰고 천하대업을 위해 군사를 이끌고 북벌을 나섰을 때 통과한 곳이
바로 이곳이었고 강유가 촉한의 후주인 유선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곳도 이곳입니다.
강유는 그 소식을 접하고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아! 이제 하늘마저 촉한을 버리시나이까?
촉한의 시작과 마지막 소식을 함께했기에 이곳은 더 많은 사람이 아쉬워하는 곳이 아닐까요?
여행이란 이렇게 혼자만의 생각으로 해도 괜찮습니다.
강유가 풍전등화 같은 촉한을 지켜내기 위해 위나라 대군을 막아낸 곳도 바로로
목이 쉬라 외치며 독전을 했고 빗발치듯 날아오는 적의 화살을 두려워하지 않고
두 눈을 부릅뜨고 여기를 지켜냈습니다.
당시 종회가 이끄는 20만의 위나라 군사가 이곳으로 밀고 내려왔지만, 강유는 겨우
2만의 군사로 여기를 사수했고 우세한 군사로도 위나라는 이곳을 결코 돌파하지 못합니다.
강유는 "사즉생, 생즉사"를 외쳤는지 모릅니다.
절벽의 모습이 천수 선인애라는 곳에서 본 바로 그 모습입니다.
자연적으로 움푹 꺼져 비바람도 막아줄 것 같습니다.
잠시 쉬어가라고 벤치도 마련해 놓았습니다.
걷는 게 지루하고 힘이 든다고요?
이럴 때는 잠시 말춤이라도 한번 추고 가면 어떨까요?
여기는 우리 말고 아무도 없는 걸요~
그때는 말을 타고 부지런히 드나들지 않았겠어요?
결국, 이렇게 험한 검문관은 열렸지만, 전투를 통해 열린 게 아니라 촉한이
패망함으로 스스로 열었던 것이죠.
촉으로 들어오려는 자, 중원을 향해 나가는 자...
모두가 반드시 넘어야 할 관문이 바로 검문관입니다.
글자 그대로 검문관은 칼문으로 그 생긴 모습이 칼을 꽂아놓은 문처럼 보였나 봅니다.
전쟁이 끝난 후 이곳은 중원과 쓰촨을 잇는 교통로로서 역할을 담당하다가 1935년
천섬공로(川陝公路)라는 G108 공로가 부근에 새로 개통되며 교통상 더는 중요한 곳이
아니었기에 돌비석 하나만 세우고 검문관을 헐어버렸다 합니다.
이 역사적인 유적을 무식하게 말입니다.
그 후 1992년 원래 관루가 있던 자리에 다시 검문관을 복원했지만, 2008년
쓰촨 대지진 때 대부분 파괴되었던 것을 다시 복원해 지금에 이르렀다 하네요.
수천 년을 견디며 이곳을 묵묵히 지킨 천혜의 요새도 자연의 재앙 앞에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나 봅니다.
잠시 가던 발길 멈추고 귀를 기울여볼까요?
그때의 함성이 들리지 않습니까?
뚫으려는 자... 그리고 막으려는 자.
서로가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숨 막히는 시간이 몇 달을 흐릅니다.
그래도 이곳은 요지부동...
결국, 위나라는 이곳의 통과가 어렵다고 판단해 등애는 여기를 포기하고 험난한
산악을 넘어 음평이라는 곳으로 우회하여 다른 곳으로 통과하여 촉의 심장으로
들어가 유선의 항복을 받아냄으로 촉의 패망을 마지막까지 지켜본 곳도 여기입니다.
그만큼 이 길목은 군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길목이었나 봅니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는 아니지만, 험한 산길을 올라 촉한으로 가려면
바로 검각이라는 관문을 꼭 통과해야지만 지나갈 수 있는 곳입니다.
지금 이렇게 잔도를 놓으면 쉽게 넘어갈 수 있겠네요.
아! 촉으로 가는 길은 하늘로 오르기보다 어렵구나~
이런 곳이라 이백이 하늘로 올라간다고 엄살 부렸나 봅니다.
정말, 올려다보니 산으로 오르는 길이 아니라 하늘로 오르는 길이 맞네요.
이제 이백을 어느 정도 이해할 듯합니다.
사진에서 보듯이 정말 여기 관루만 막아서면 쉽게 통과하기 어려운 곳이 맞습니다.
오늘의 날씨 또한 이곳의 슬픈 이야기 때문인가 무척 안쓰럽네요.
중원 날씨는 늘 이렇지만, 오늘은 그때의 느낌이 생각나 더욱 을씨년스럽습니다.
촉견패일이라는 말이 있기에 이곳 쓰촨은 각오하고 왔지만,
우리의 기대에 전혀 어긋남이 없습니다.
촉한의 패망을 지켜보아 그랬을까요?
망국의 한과 서러움을 그대로 담고 있는 듯합니다.
관루의 높이는 19.62m이고 좌우로는 18.3m의 크기라 합니다.
공명은 1차 북벌에서 천수를 공격하며 그곳 출신 강유라는 장군을 얻었습니다.
공명이 후계자로 삼아 병법책과 전쟁에 필요한 기구 등을 그린 설계도를 강유에게
전하고 죽었다는데 공명이 마지막으로 선택한 후계자가 바로 강유입니다.
그 강유가 바로 여가 검문관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아주 밀접한 관계지요.
그래서 이곳에 사는 주민은 강유를 무척 아끼나 봅니다.
너무 아끼다 보니 강유 두부라는 음식도 있습니다.
얼마나 여기에 한이 맺혔으면 강유가 죽어 이곳 검문관을 아직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다는 말입니까?
지금은 관루만 남았지만, 절벽과 연계하여 성벽을 쌓아 출입은
검각문을 통해서만 가능하게 했을 겁니다.
양쪽 절벽을 자세히 보면 당시 쌓았던 성벽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강유천이라는 샘입니다.
그냥 샘이지만, 강유라는 이름을 붙여 더 폼 나라고 해서 붙인 이름일 겁니다.
처음 공명이 북벌을 계획하고 이 관루를 통과해 북으로 지나간 후
그는 한 번도 다시 여기를 넘어들어오지 않았답니다.
한중에 머물며 전투를 지휘하다 마지막 오장원에서 숨을 거둔 후 죽은 후에야
시신이 여기를 통과해 촉의 도읍으로 갔다가 다시 여기를 지나 한중 면현에 있는
정군산기숡에 공명이 원했던 모습으로 안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못내 아쉬워 가던 길 멈추고 다시 검각 주변을 돌아봅니다.
검문관 관문 앞에 서서 우두커니 열린 문을 바라봅니다.
지금은 관광객마저 드나들지 않습니다.
저 문 밖에는 어떤 세상이었을까요?
그때는 말입니다.
검문관은 군사요충지이기에 삼국이 천하대업을 노리고 싸우기만 한 곳이
아니고 당나라 때는 윈난의 반란을 제압하기 위해 절도사 엄려가 이곳에서 류벽이
이끄는 반군을 토벌했으며 가장 최근에는 1935년 4월 2일에 홍군이 이곳에서 쓰촨의
군대와 마주해 3개 소대를 전멸시키기도 했던 곳이랍니다.
여기가 전투가 많았다는 말은 그만큼 군사적인 요충지였다는 말이 아니겠어요?
저기 절벽 밑으로 문인이 이곳에 왔다가 남긴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봐야 내용도 모르기에 이렇게 사진 한 장으로 대신합니다.
검문관은 강유를 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곳이지요.
기재는 뛰어났기에 공명이 후계자로 삼았지만, 사실 상상만큼 그렇게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한 불운의 장수라 해야 할 겁니다.
공명이 죽은 후 9차례나 북벌을 시도했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네요.
뭐 괜찮습니다.
천하의 공명도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으니까요.
천하웅관 검각에 올라 佳人이 벌을 서고 있습니다.
왜?
매일 들고 다녔던 독도를 알리는 글을 오늘은 그만 숙소에 두고왔기 때문입니다.
검문관에 올라 바라보니 아마도 북쪽에는 위나라군이 포진해 있었을 것이고 종회의
명령에 따라 수십 차례 여기를 공격했겠지만, 강유가 지키던 이곳은 결코
이 관문은 열 수 없었다 합니다.
지금도 이곳에 서서 바라보니 그때의 함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이곳에 서서 바라보니 정말 험하기 이를 때 없고 한 사람이 지켜도
만 명을 막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佳人 혼자만으로도 만 명의 중국인을 다 물리칠 것 같습니다.
독도를 두고 억지를 부리는 천박한 일본인도 모두 제압할 것 같습니다.
일부당관(一夫當關), 만부막개(萬夫莫開)...
그 한 사내라는 一夫는 오늘은 바로 佳人이었습니다.
아무도 佳人의 허락을 얻지 못하고 오늘은 아무도 이 관문을 지나갈 수 없습니다.
시진핑일지라도...
오늘은 佳人이 막아서고 있는 한.
이 지역에는 두부 요리가 아주 유명하다 합니다.
그래서 오늘 맛만 보고 갑니다.
맛을 보니 역시 두부 맛이었습니다.
강유가 위나라 대군을 막아서며 싸울 때 군사에게 먹일 군량미가 부족했다 하네요.
이때 강유는 부하에게 명령을 내려 이 지역에서 많이 재배하는 콩을 이용해
두부를 만들라 하고 그 두부를 군사에게 먹이고 두부를 만들고 난 콩비지는 군마에게
먹이니 그동안 먹지 못해 비실거리던 군사나 말이 바로 원기를 회복했다 합니다.
이렇게 체력을 회복한 강유 군사는 수십 만의 적을 통과시키지 않고 마지막까지 버틸 수
있었다 하며 그 후부터 이 마을은 두부요리가 유명해졌고
지금까지 지방 특산물로 널리 알려졌다 하네요.
오늘 佳人도 강유 두부를 먹었습니다.
누구라도 모두 이길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억지 부리고 역사 왜곡이나 하고 자빠진 천박한 인종인 왜구는
두부의 힘으로 제압할 것 같습니다.
이곳 검문관 주변은 모두 두부요릿집입니다.
두부 요리가 집집이 50여 가지서부터 100여 가지나 된다고 합니다.
강유 두부, 검문 두부...
그러나 모두 두부 요리입니다.
검문관에 들리시면 꼭 두부 맛을 보세요.
특히 강유두부 말입니다.
정말 꼭 두부 맛입니다.
경구 입구가 모두 두부 요리하는 식당입니다.
잠시 쌀쌀한 날씨 때문에 불을 쬐라 하기에 우리도 그곳에 앉아
군불을 쬐고 몸을 녹이고 갑니다.
이곳 검문관에 온 기념으로 지금 佳人이 손가락 내공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아주 깊게 검문관이라는 글자를 손가락으로만 쓰는 중입니다.
이런 단단한 돌에 손가락만으로 글을 쓴다는 일이 쉽지만은 않더군요.
다음에 가시면 검문관 입구에 佳人이 남긴 자취를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으로 지루한 검문관 여행을 끝냅니다.
내일은 멋진 잔도가 있는 명월협으로 갈 예정입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강유가 죽은 후 평양후에 봉해졌다 하지만, 아마도 이 호칭은 촉에서 내린 것은
아닐 것 같고 강유의 무덤에는 사실 시신이 없을 것 같습니다.
죽을 때 비참하게 짓이겨져 죽어 거둘 게 별로 없었다 합니다.
그래서 이곳에는 옷과 모자가 묻힌 의관총이라 합니다.
강유가 죽었을 때 배를 갈라보니 강유의 간이 다른 사람의 몇 배나 더 컸다고 합니다.
간이... 부었나요?
여기는 슬프지만 정말 멋진 곳입니다.
멋지다는 말은 풍경만이 아니고 소리가 있고 이야기가 있고 혼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누구나 이 자리에 서면 정말 잘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한때 위와 촉의 국경이 바로 여기였잖아요.
그때도 출입하려면 비자 받으라 했을까요?
촉한은 가맹관에서 시작했고 이곳 검문관에서 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