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전 뒷모습
이곳 공묘 안을 돌아다니다 보니 정말 많은 황제와 유명한 사람이 다녀갔네요.
저마다 여기에 얼굴을 비쳤다고 인증 샷처럼 증거를 비석이나 편액 등으로 남겼습니다.
그 이유는 중국사람 모두가 존경하는 사람을 존경하고 있다는 동질감을 심어주고 황제는 덕으로 나라를
경영한다는 것도 보여주기 위한 일이 아닌가 생각되네요.
공자를 끔직이도 섬긴다는 말은 그만큼 민초를 아낀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많은 황제가 다녀가다 보니 가지 않은 황제는 무식하고 바보같이 취급받아 더 가게 되나요?
더군다나 오랑캐라는 손가락질받았던 북쪽에서 내려온 정권일수록 더 열심히 방문했다는 느낌이 듭니다.
여기만 다녀가면 모두 문명인이 되는 겁니까?
그만큼 공자의 덕이 대단하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대성전 뒤로는 공자의 부인인 기관 씨(亓官氏)를 모신 침전(寢殿)이 있습니다.
건물의 크기가 대단히 크네요.
침전이란 우리말로 흔히 잠자는 곳을 일컫는 말이 아닌가요?
그러나 안을 들여다보니 잠자는 곳이 아니라 제를 올리는 곳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커다란 건물에 그게 방이라면 너무 썰렁하게 보이네요.
그리고 공자 생전에 있지도 않았던 건물이 아닐까요?
같은 한자어도 우리와는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 안에는 위의 사진처럼 감실을 만들고 그 안에 위패를 모셔두었네요.
1018년 송나라 천희 2년에 처음 이 건물이 지어졌고 1730년 청나라 옹정 8년에 다시 지은 건물이랍니다.
공자는 중원에서 일어난 권력이든 만리장성을 넘어온 세력이든 모두 존경하고 아꼈던 인물이었습니다.
앞에는 공자의 위패를 모시고 뒤에는 공자 부인의 위패를 모셨나 보네요.
침전 뒤로는 성적전(聖跡殿)이 있어 그곳에는 공자의 일화를 새긴 석각화 120장과 공자 화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명나라 만력 20년에 석각으로 성적지도를 기초로 하여 만들었다 합니다.
전각 내에는 공자의 주요 일화와 활동에 대한 그림을 돌에다 새겨놓았습니다.
만세사표라...
여기에는 동진의 유명한 화가였던 고개지와 당나라 때의 오도자 등의 그림을 석각화로 남겨져 있다네요.
고개지는 대영박물관에 걸린 여사잠도라는 대단한 그림을 그린 화가로 유명한 사람이라고 하네요.
공자의 일대기를 120장의 석판에 나타낸 석각화와 공자 화상, 고개지가 그린 공자행교상을 봉안했습니다.
120장의 석각화는 매 장마다 4분의 3이 정교하게 돌에다 새긴 그림이고 나머지는 설명문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실내가 너무 어두워 글을 읽을 수 없네요.
죄송합니다.
자수하렵니다.
사실, 글자가 너무 어려워 읽을 수 없었습니다.
어둡기도 하거니와 유리로 가려놓아 사진도 찍을 수 없습니다.
그다음 건물은 후토사(後土祠)라는 사당이 보입니다.
그러니 이곳은 공묘가 자리한 곳의 토지신을 모신 사당으로 금나라 때 처음 지었다 합니다.
여기에 모신 신은 골목대장 신으로 위수 지역이 바로 이 동네라는 말이겠지요.
동네를 꽉 쥐고 있는 신을 모신 사당도 불에 모두 타버려 명나라 때 다시 지었다 하니
동네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나 봅니다.
칫! 수신제가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동네를 관리한다고요?
지금의 건물은 1988년에 지었다 하니 골목대장 신도 파워는 별로였나 보네요.
이번에는 신포(神庖)라는 건물입니다.
이 말을 그대로 해석하면 신의 주방이라는 말일 겁니다.
그러니 신주라는 곳과 같은 곳이 아닐까요?
신주라면 이미 우리가 베이징의 천단공원을 갔을 때 하늘에 제를 올리기 위해 음식을 장만하던
주방으로 본 적이 있는 건물이지요.
여기는 공자에 제사를 올릴 때 이곳에서 돼지나 소나 양을 잡던 곳인가 봅니다.
차라리 용 한 마리 잡았더라면 더 멋진 제사를 올릴 수 있었을 텐데...
이 건물은 청나라 때 만든 곳이라 하네요.
그러나 1999년 이후 지금은 취푸 한화상석전관(漢畵像石展館)으로 바뀌어 버렸답니다.
취푸나 이 인근에서 발견된 한나라 시기의 석각 그림을 모아 전시한 곳이라 합니다.
공자 제사니 뭐니 하는 것도 수천 년간이나 지켜왔던 전통도 이렇게 사회주의가 들어서며 사라져 버렸습니다.
오죽했으면 우리나라 성균관에 와 다시 배워갔겠어요?
쉽게 말하면 지금은 신주를 돌을 보관하는 창고로 쓰고 있다는 말입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돌로 만든 기둥도 보입니다.
이 석주(石柱)라고 할 기둥은 그냥 돌로 쌓아놓은 게 아니라 조각을 해놓아 무척 아름답습니다.
한나라 시기에는 본 건물로 들어가는 입구 양쪽에 이런 석주를 세워놓았다 합니다.
화표와 비슷한 용도의 기둥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 기둥은 그냥 기둥으로서의 역할을 한 게 아니라 그 건물 주인의 지위를 나타내는 의미라 합니다.
권위와 위상이라는 말일 겁니다.
크고 더 많이 만들어 놓은 집일수록 권력이 많다는 말이겠지요.
결국, 힘자랑하는 그런 돌입니다.
여기에 있는 돌조각은 한나라 시기의 석각 조각 예술을 알 수 있는 매우 귀한 자료가 될 겁니다.
건물에는 주방은 사라지고 모두 아름다운 석각 조각 예술품으로 채워 넣었습니다.
여기서 본 석각 예술품 중 눈에 띄는 게 있어 소개합니다.
위의 사진에 보이는 돌은 1937년 취푸 인근에서 발견된 한가포(韓家鋪)라는 마을의 묘지에서 나온
쌍실 안에 있던 석판입니다.
묘의 네 면에 우리에게도 익숙한 동물이 새겨져 있습니다.
위의 사진을 보시면, 오른쪽 조금 긴 석판에 새겨진 조각이 청룡입니다.
이미 여러분도 용을 하도 많이 보셔서 별로 감흥이 없지요?
묘지 안에 만든 석곽에 새긴 짐승은 그 순서가 동쪽에는 청룡, 서쪽에는 백호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백호는 위의 사진 중 왼편 긴 석판에 새겨져 있네요.
한가운데에 호랑이를 확인하셨죠?
고양이가 절대로 아닙니다.
죽어서도 좌청룡 우백호를 찾았나 봅니다.
남쪽에는 위의 사진처럼 주작이 새겨져 있고 북쪽에는 당연히 현무가 있지요.
남북으로 길게 만든 석판은 청룡과 백호를 새긴 석판과는 다르게 정사각형에 가깝습니다.
그러니 무덤은 남북으로는 긴 석판이고 정사각형의 석판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마도 머리 쪽에 새긴 게 주작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위의 사진은 현무라고 하네요.
조각으로 보았을 때 현무는 공룡의 왕이라는 티라노사우루스처럼 생기기도 했네요.
혹시 이때에 공룡이 살았을까요?
이런 모습은 서한 말기의 묘지 형태라 합니다.
따라서 서한 말, 장례풍습을 밝히는 대단히 중요한 유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를 모두 보았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지금 여기가 신포(神庖)라고 제사 지낼 때 제사에 필요한 양이나 돼지, 그리고 소를 잡던 곳이라 했습니다.
혹시 우리도 모르게 청룡, 백호, 주작, 현무를 잡고 그 기념으로 위의 석곽을 보관한 게 아닐까요?
워낙 중국이라는 나라는 우리의 상상 그 이상이니까요.
여행사 단체여행을 가신다면 부실한 가이드를 빼고는 자세히 알려주겠지만, 우리처럼 자유 배낭여행을 계획하고
미리 알지 못하고 떠나시면, 우리 부부처럼 아주 답답한 여행이 될 것입니다.
그래도 여행은 떠나야 합니다.
이제 지루하시겠지만, 석판 몇 개만 더 보고 가겠습니다.
이번에도 취푸와 인근 미산(微山)시에 있는 양성산(兩城山)에서 부분 출토된 석각화라고 합니다.
여기에 전시된 석각은 대부분 동한 시대 작품이라 합니다.
작품 대부분이 주제가 있고 내용이 풍부한 것들이라네요.
전설적으로 내려오는 이야기와 당시의 사회생활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물론, 우리 부부는 석판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다니고 있습니다.
안다고 달라질 것도 사실은 아무것도 없으니 마찬가지입니다.
그중에서도 위의 석판 하나는 제대로 알겠습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이야기인 편작이 의료시술을 하던 모습을 석판에 새겨 놓은 편작행의(扁鵲行醫)가 있습니다.
가운데 집 안에 앉아있는 사람이 편작이 아닐까요?
편작의 놀라운 의술에 하늘이 감동하였나 봅니다.
이것도 알겠습니다.
나무뿌리가 달라도 서로 얽히며 하나가 되었다는 부부의 사랑을 의미하는 연리수(连理树)도 새겨놓았습니다.
부부간의 사랑이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최고의 가치인가 봅니다.
물론 당시의 하이 소사이어티의 놀이인 사냥 모습을 새긴 행렵도(行猎圖) 등을 볼 수 있습니다.
석 조각에 관심이 있으신 분은 이곳에 들리시면 아주 시간 가는지 모르고 즐길 수 있겠네요.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공자는 지금으로 치면 스타강사였을 겁니다.
노나라 사람으로 제나라에 가 정치인으로는 성공한 삶이 아니었지만,
행단 위에만 서면 세상의 진리가 입에서 줄줄 나오는 시대가 낳은 최고의 강사가 공자가 아니었을까요?
아무리 천하의 공자라도 그 시대에 태어났기에 이름이라도 날렸지 만약, 문화혁명 시기에 살았더라면
자아비판에 돌에 맞아 죽었을지 모릅니다.
아무리 위대한 성인이라도 이렇게 활동하던 시대에 따라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도 있고
비판의 대상이 될 수도 있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