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여행기/산동성(山東省)

규문각과 13 비정이 있는 공묘

佳人 2012. 7. 19. 08:00

공묘는 대전이 세 곳이 있고 방이 466개와 비석이 2.000여 개나 있다고 하니

여기도 비석의 숲을 이루네요.

그래도 이름깨나 알린 사람이 여기에 오면 자기도 공자를 존경한다는 의미로 기념식수하듯

비석 하나씩 남기고 가다 보니 비석의 숲을 이루었겠네요.

 

죽은 공자가 그 사람을 알기나 하겠어요? 안 그래요?

과연 이렇게 넓은 장소가 필요하겠느냐는 생각이 들지만, 이 또한 공자는 세상 사람에게

 정신적인 지주나 마찬가지니... 그나마 이곳의 비석은 붉은 기운이 많이 손대지 않았나 봐요.

 

공묘는 크게 외부(外部), 전부(前部), 후중부(後中部), 후동부(後東部), 후서부(後西部) 등

다섯 개의 구역으로 구분할 수 있답니다.

외부에서 문표를 사고 좌우를 둘러보면 공묘 입구에 곡부의 고대 성벽인 남문이 지키고 있습니다.

이제 천천히 또 걸어 들어가며 두리번거리며 살펴보는 중입니다.

좀 더 안으로 또 들어갑니다.

 

그곳을 지나면 눈앞에 송나라 때 만들었다는 웅장한 모습의 도서관인 규문각(奎文閣)이 나타납니다.

1018년인 북송 천희 2년에 지었답니다.

지금의 이름인 규문각은 1191년 금나라 명창 2년에 변경했다네요.

원래 이름 장서루는 규주문장(奎主文章)이라는 말에서 규문각으로 변경했다 합니다.

높이가 23m 나 되는 이 건물을 천 년 전에 지었다니...

그 보존상태가 완벽에 가깝다 합니다.

현존하는 목조건물로 중국 제1의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는 건물이라 하니 자세히 봐야겠어요.

 

아마도 공자의 글이 별처럼 빛난다 하여 별 이름 奎, 글월 文이라는 이름을 붙인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런데 규문각의 지붕을 보면 황금색 기와가 올려져 있습니다.

중국에서 지붕을 황금색으로 올리는 곳은 황제가 머무는 곳 외에는 큰일 날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거 황제에게 알려지면, 대역죄인이 되는 게 아닐까요?

이 의미는 황제라도 공자를 끔찍이 생각했다는 의미가 아니겠어요?

 

괜찮답니다.

규문각이라는 현판을 청나라 건륭제의 친필이라고 하니 누가 시비 걸겠어요?

지금의 모습은 명나라 홍치 17년에 확장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합니다.

이때 지붕을 노란 기와를 올렸다 합니다.

이 의미는 황제가 공자를 끔찍이도 생각한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규문각에는 주로 황제가 내린 책을 보관하던 곳으로 단 하나의 못도 사용하지 않고 지었답니다.

규문각은 침전, 대성전과 더불어 공묘의 3대 건축물로 꼽히고

중국 고대 10대 명루(名樓)로 꼽히 유명한 누각이랍니다.

2층에 난간이 있고 원형 주춧돌 위에 석고를 다시 놓고 팔각형 기둥을 세운 것이 이채롭습니다.

 

그러나 이 규문각 안에 보관하였던 책은 모두 광란의 큰 잔치라는 문화 대혁명 때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 오랜 세월 모진 풍상을 겪으며 묵묵히 지내온 세상의 진리도

미친 광신도들에 의해 이렇게 사라졌습니다.

어디 이곳뿐이겠습니까?

 

그리고 책뿐이겠습니까?

그런 정신마저 사라져 버린 게 더 무섭지 않았을까요?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건물은 그대로 살아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사라진 책이라도 어디에 온전히 보관되어 있다면 좋겠습니다.

 

이곳에는 또 많은 비정이 있어 황제마다 앞다투어 비석을 세우고 글을 남겼으며

그 비석이 오래도록 변치 말고 유지되도록 정자를 만들어 씌웠습니다.

가장 오래도록 묵묵히 세월을 이기는 비석마저도 정자를 만들어 씌웠다는 말은

그 비석이 아주 중요한 비석이라는 말이 아니겠어요?

 

규문각 옆으로 난 작은 문을 통과하면 황금색 지붕을 머리에 인 13개의 정자가 나타납니다.

그 비석은 황제가 내린 비석이라는 말일 겁니다.

 

이곳을 13 비정(十三碑亭)이라고 부른답니다.

 그 내용은 황제의 시호나 공자를 칭송하는 돌비석들이라는군요.

이곳에 보관된 비석의 숫자가 서안에 비림이라는 곳에 보관된 비석의 숫자보다 많다고 하는데....

 

13 비정은 금나라 시기에 처음 양쪽으로 두 개를 만들었고

그 비정은 규문각 뒤에 있다는데 금나라 명창 2년인 1191년에 만들었다네요.

그 모습이 북방 민족답게 호방하고 공묘의 비정 중 제일 먼저 만든 것이랍니다.

원나라 시기에 마찬가지로 또 좌우로 두 개를 만들었답니다.

 

그리고 청나라 시기에 무더기로 9개를 만들어 놓았기에 합이 13개나 되는 비정이 있어

13 비정이라 부르나 봅니다.

내용은 잘은 모르겠지만, 공자를 찬양한 글이 아닐까요?

아니면 말고...

 

위의 사진에 보이는 비석을 등에 올린 오구는 무척 힘이 드는지 입을 벌리고 있군요.

지나는 사람마다 "오구오구~"하며 코를 만져 반질거립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여기에 비석을 세운 나라는 모두 한족의 나라가 아니고 만리장성을 넘어와

중원에 안방을 차린 북방민족이 세운 나라뿐입니다.

이게 오랑캐라는 누명을 벗기 위한 마케팅 용인 가요?

아니면 진정 문명국은 오랑캐라고 모함을 받고 지금까지 중원의 주변에 살았던 민족이고

오랑캐의 원조는 한족이라는 말인가요.

 

마치 행세깨나 하는 집안의 결혼식이나 초상집에 가면 화환이 숲을 이루지요.

이런 말을 하면 공자께서 섭섭해할까요?

시실 공자의 덕은 이런 겉치레 같은 글로 표현해야 하는 게 아니잖아요.

문제는 화환이 아니고 진심 어린 마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히려 아무것도 없이 이곳을 찾는 사람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솔한 마음으로 덕을 칭송하면 되지 않을까요?

제가 비석의 글을 읽을 수 없어 투정 부린다 생각하시지요?

그렇지요?

사실입니다.

 

내용을 알아야 그게 칭송하는 글인지 욕하는 글인지 알 게 아니겠어요?

여기에만 55개의 비석이 서 있다네요.

그런데 어렵다는 한자만이 아니고 만주족의 글자나 몽골어로도 기록되었다는 겁니다.

그걸 제가 무슨 재주로 읽는답니까? 안 그래요?

 

황제의 비석만 13개로 가장 오래된 비석은 688년 당 고종이 세운 것이고 가장 큰 것은

청나라의 강희제가 베이징의 서산으로부터 낑낑거리고 가져온 것으로

무게가 무려 65톤에 이른다 합니다.

 

그곳에서 여기까지 무려 650km인데...

겨울에 물을 뿌려 얼린 후에 운반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비석 크다고 공자가 더 인정해주기라도 할까요?

 

정자를 지나 이제 공묘의 마지막 문인 대성문이 있습니다.

그 안에는 공자가 크게 학문을 이루었다는 의미의 大成이라는 글이 보입니다.

1104년 송나라 숭령 3년에 처음 건립했으며 그 이름은 바로 대성전에서 따왔을 겁니다.

 

대성문 양쪽으로도 문이 있는데 동쪽에 있는 문을 금성문(金成門)이라 하고

서쪽에 있는 문을 옥진문(玉振門)이라 한다네요.

그 이유는 맹자가 말하길 공자의 학문을 집대성하여 발전시킨 사람이 金成而와 玉振이라는 말을

한 데서 따왔다 합니다.

그러니 대성문은 양쪽으로 좌청룡 우백호를 거느리고 싶었나 봅니다.

 

문 이름을 이렇게 쉽게 지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읽기 쉽고 쓰기 쉽고 외우기 쉽게...

청나라 옹정 2년에 화재를 당해 소실되어 다시 지었다 하네요.

규모와 건축학적 기술이 대단한 건축물로 자태가 무척 아름답습니다.

세종인 옹정 황제가 그곳에 글을 새겨 넣었다고 하네요,

왜 멀쩡한 문이 불이 났을까?

혹시?

 

대성문으로 오르는 곳에 양쪽으로 돌기둥 두 개가 서 있습니다.

지금 돌에다 무슨 짓을 했단 말입니까?

도대체 이런 모습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여의주를 희롱하는 용이 마치 살아있는 듯 꿈틀거리는 게 보이십니까?

 

이러다 용이 기둥을 박차고 날아가기라도 한다면 대성문을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릴 게 아니겠어요?

손 타지 말라고 쇠창살로 막아놓았지만, 사람마다 지나가며 여의주와 용머리를 만져

아프리카에서 온 용처럼 까맣게 변해갑니다.

원래 사람은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가 봅니다.

이게 플라스틱으로 찍어낸 것도 아니고 돌기둥에다 조각한 용 기둥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이제 대성문을 통과합니다.

안쪽으로도 양쪽에 또 두 개의 용 기둥이 서 있습니다.

지금까지 佳人이 보아 온 용 기둥 조각 중에 최고로 아름다운 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 용의 모습이 얼마나 정교한지 한참을 서서 구경했습니다.

여러분도 그곳에 가시면 용 기둥을 자세히 바라보세요.

용도 佳人이 바라보는 것을 눈치챘는지 윙크까지 하더이다.

끙!

안 믿는 거 다 압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 윙크를 담아 보내면 상대 또한 윙크하게 돼 있거든요.

그곳에 서서 하품만 해보세요.

용도 따라서 눈까풀이 풀려 게슴츠레한 졸린 눈으로 하품할 겁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공묘는 중국의 황제 중 12명이나 이곳을 직접 찾아 공자에 제를 올렸다 합니다.

대학자로 인정받은 사람도 172명이 이곳에 참배했다 합니다.

아! 한 사람 더 추가하여 173명으로 고쳐야 합니다.

추가된 사람이 누구냐고요?

그걸 부끄럽게 어찌 말합니까? 

끙!

 

기원전 478년 공자가 죽은 후 공자가 살았던 집터와 애공의 집에

이듬해 처음 이곳에 사당을 만든 후 오랜 세월 동안 확장하고 고치며 지내오다

지금의 틀을 갖추기 시작한 게 명나라 중반부라 합니다.

 

남북으로 1.3km 동서로 650m의 직사각형의 터에 9진 정원인 아홉 개의 구간으로

나뉘어 있는데 460개의 방이 있고 진, 원, 명, 청대 100개의 건축물이 있습니다.

전 세계 2.000여 개의 공자 사당 중 가장 큰 곳이라 합니다.

여기가 공자를 모신 본사가 아니겠어요?

 

1961년 중국 최초로 중국 정부의 문화유산으로 정해졌고 1994년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된 곳입니다. 

용 문양으로 조각한 기둥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여기만 있는 유물이라고 합니다.

이곳을 가시면 돌기둥에 조각해 놓은 용을 유심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뻑~ 소리 나게 가실 겁니다.

저도 한참을 서서 바라보았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