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여행기/산동성(山東省)

공묘는 문만 통과합니다.

佳人 2012. 7. 18. 08:00

 

정면을 바라보니 위의 사진처럼 공묘의 두 번째 문인 성시문(聖時門)이 보입니다.

이제 문다운 문을 보나 봅니다.

패방도 일종의 문이라 생각하면 지금까지 몇 개의 문을 통과한 지 모르겠습니다.

이곳에 다녀간 황제가 방문 기념식수하듯이 하나씩 만들다 보니 그렇게 되지 않았나

생각되는데 이곳에만 다녀가면 황제 스스로 업그레이드되는 기분이 드나요?

1415년 명나라 영락 13년에 공묘의 대문으로 처음 만들었고 청나라 옹정 8년인

1730년에 성시문이라 이름 지었다 합니다.

 

 

이 말은 맹자가 한 말 중 "孔子 聖之時者也"에서 따온 말이라 합니다.

아마도 이 말의 의미는 "공자는 성인으로 시대를 초월해 언제까지 영원하다."라는 말인듯

그러나 맹자도 공자만큼 대단한 인물이 아닌가요?

그런 사람이 공자를 성인으로 대접했다는 말은 다른 추천이 필요하지 않을 겁니다.

 

 

공자님을 모시는 공묘에 이렇게 패방을 많이 연이어 설치한 이유가 뭘까요?

그러나 차례로 통과하다 보면 웅장한 돌기둥으로 말미암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옷깃을 여미게 됩니다.

그것을 노린 겁니까?

여기서 검표소를 만들어 놓아 표 검사를 또 합니다.

 

 

성시문(聖時門)을 통과하면 위의 사진처럼 제법 넓은 정원이 나타납니다.

원래 지금 공묘의 땅은 노나라 때 애공(哀公)의 집이었다 합니다.

공자가 죽은 이듬해 애공이 공자의 죽음을 애달파하여 애공애공~ 하며 자기 집을 공자의

사당으로 기증하여 지금에 이르렀다는군요.

이 말은 이미 그때부터 공자의 덕이 세상에 널리 떨쳤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처음부터 지금처럼 제대로 모습을 갖춘 게 아니라 지금의 모습은 청대의 옹정제 때 골격을

갖추었다 하는데 이상한 일은 오랑캐라고 했던 청나라 때

정말 많은 문화사업을 했다는 점입니다.

너무 오랑캐라고 나무라지 마세요.

심성은 착한 민족이 아닙니까?

 

 

그러니 민족을 불문하고 중국인 대부분이 존경하는 공자를 내세워

마케팅에 들어간 게 아닐까 생각되네요.

이렇게 했기 때문에 야만인의 때를 벗어 조금 더 오래 중원을 다스렸는지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이 존경하는 사람을 내세워 사업을 한다면 우선 시작부터 성공적이지 않을까요? 

 

 

정원을 지나면 명나라 홍치 13년(1500년)에 돌로 만들었다는 다리가 앞에 보입니다.

물론 그 후 청나라 때 다시 만든 게 지금의 모습입니다.

청나라는 정말 이곳을 완전히 리모델링했군요?

그 다리 이름이 벽수교(璧水橋)라고 하는군요.

그 다리 아래로 흐르는 냇물이 물론 벽수겠지요 뭘~

 

 

그러나 깨끗한 물이 아니고 지금은 오염된 더러운 물이 흐릅니다.

벽수의 물은 천자가 공부하는 거처로부터 흘러 이곳으로 온다 합니다.

벽(璧)이란 가운데 구멍이 뚫린 둥글고 평평한 옥을 의미한다네요.

이 말의 의미는 교육의 중요성과 연속성을 의미하는 말이 아닐까요?

쉬지 않고 정진하고 나이도 불문하고 영원히 계속해야 하는 게

바로 공부라는 의미라 생각하고 싶습니다.

 

 

벽수교를 지나면 공묘의 제3문인 홍도문(弘道門)이 나타납니다,

홍도문은 명나라 때인 1377년 홍무 10년 처음 만든 문이라 하네요.

그때는 이 문이 공묘의 정문이었다 합니다.

홍도야~ 우지 마라~~ 오빠가 왔다.

오잉? 그 홍도가 아닌가 봅니다.

 

 

그러나 문 이름은 청대의 옹정제가 논어의 한 구절을 따서 붙였다 합니다.

논어의 위령공편에 인능홍도(人能弘道) 비도홍인(非道弘人)이라는 구절에서 인용한 말로

그 의미는 "사람이 도를 넓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게 아니다."라는 의미라 하네요.

그리고 황제가 쓴 편액을 하사했다고 합니다.

제법 폼 나는 말이지요?

 

 

홍도문을 지나면 공묘의 제4문인 대중문이 나타납니다.

대중문은 처음 송나라 때 처음 만들었고 북송 때는 이 문이 공묘의 대문이었다 합니다.

명나라 홍치 13년에 중수했으며 청나라 건륭황제는 편액을 직접 써 하사했다 합니다.

역시 건륭입니다.

 

 

 정말 많은 문이 공묘에는 있습니다.

공묘를 돌아보는 일은 문을 통과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공묘 투어는 문 투어고 비석 투어네요.

이제 문은 다 통과했느냐고요?

 

아닙니다.

또 문입니다.

 

 

그리고 제5문인 동문문(同文門)을 만나게 됩니다.

어때요?

역시 공묘 투어는 대문 투어가 맞지요?

그러다 보니 공묘는 점점 더 넓어지게 되어 지금처럼 넓은 면적이 되었나 봅니다.

이 문은 일찍이 송나라 때 만들었네요.

 

 

그 후 여러 차례 중수 과정을 거쳐 청나라 강희제 때 참동문(參同門)이라 정했지만,

옹정 7년에 홍정제가 명을 내려 이름을 지금의 이름인 동문문으로 고쳤다 합니다. 

동문문은 공묘의 제5문이지만 다른 문처럼 동서로 뻗은 울타리가 없다는 점이 달라

독립된 문이라 할 수 있겠네요.

동문문은 예기에 나오는 말인 서동문, 행동륜(书同文, 行同伦)이라는 글에서 따왔다 하네요.

 

 

동문문을 들어서면 뜰에는 홍무, 영락, 홍치 등 여러 황제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이

있는데 이 중에서도 1468년 명나라 성화제(헌종)의 친필을 새겨놓은 성화비가

가장 유명하다고 합니다.

이곳 공묘에는 많은 비석에 글이 새겨져 있지만, 이 비석의 글이 가장 아름답다고

알려졌는데 글씨가 단순하며 힘이 있고 위엄이 있다고 합니다.

 

물론, 무식해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중국인 단체여행객이 가이드를 따라와 이곳에

순서를 기다리며 설명하는 것으로 보아 공묘에서는 제일 유명한 비석으로 생각되네요.

그런데 佳人은 글조차 읽을 수 없지만, 한참을 서서 바라보았네요.

왜?

그냥 빨리 돌아서면 손가락질할까 봐요.

이런 곳을 다니다 보면 중국 단체여행객을 끌고 다니는 중국인 가이드가 많이 가는 곳에

뭔가 다른 곳이라 보면 될 겁니다.

 

 

황제가 쓴 글의 비석은 힘깨나 쓴다는 동물인 오구(烏龜)가 짊어지고 있습니다.

오구는 용의 자손이지만, 거북의 일종으로 힘이 장사이기에

무거운 돌비석을 등에 지고 있다네요.

어때요?

꽉 다문 입을 보면 마치 거북 세상의 돌쇠처럼 생기지 않았나요?

인간 돌쇠는 마님을 위해 장작이나 패지만, 거북 돌쇠는 이렇게 오랜 세월

무거운 돌비석을 등에 짊어지고 있네요.

 

 

눈을 돌려 좌우를 바라보면 동서의 담장에 각루(角樓)가 두 개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마치 좌청룡 우백호를 거느린 듯 단아하면서도 멋들어진 모습입니다.

드물게도 이 각루는 원나라 때 만든 것이라 하네요.

황궁에 있는 각루를 그대로 모방해 만들어 놓았다네요.

 

우리가 자금성에서도 귀퉁이에 세워둔 각루를 보았습니다.

각루를 설치함으로 공묘가 황궁과도 같고 외관상 위엄과

경외심마저 심어주는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여기를 대단히 중요한 장소로 인식했다는 말이 아니겠어요?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공묘(孔廟)는 남북의 길이는 약 1킬로, 면적은 22만 제곱미터.
기원전 480년, 공자 사후에 그의 제자들이 공자가 직접 강의하던 행단(杏壇)에 사당을 지어

위패를 모신 것이 시작인데 일 년 뒤 주나라 경왕 12년에 애공이 고쳐 제사를 올렸고

153년 동한 말의 환제가 처음으로 국가적 차원에서 묘당을 지었으며 위나라 황초2년(221년)

공자가 거처하던 3 간의 집을 사당으로 삼아 공자 생전에 쓰던 의관과 거문고, 수레,

책 등을 보관하여 공묘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 후 송나라 진종 천희 2년(1018), 금나라 명창 2년(1191), 원나라 성종 대덕 4년(1300),
원나라 순제 지원 2년(1336)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 확장되었고 명, 청 양대에 걸쳐

앞 시대에 된 것을 중수, 보수, 확장하여 오늘날의 규모로 완성되었다고 한다네요.

공묘는 3개의 전(殿), 1개의 각(閣), 1개의 단(壇), 3개의 사당(祠堂), 2개의 당(堂), 2개의 서재,

466개의 방과 54개의 문으로 되어 있고 여덟 군데에 출입문이 있으며 9개소의 정원과

2000여 개의 석비가 있다고 합니다.
황제가 내린 비(碑) 라야 비 대접을 받아 누각을 세워 비바람을 면할 뿐

보통 비는 비도 아니라는 말일 겁니다.
명사 명필이 짓고 쓴 비석은 하도 많아서 여기도 비림(碑林)이라고 부른다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