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린은 가장 오래된 가족묘지가 아닐까요?
오늘도 어제에 이어 또 꽁린입니다.
취푸는 중국 정부가 발표한 24개 역사도시 중 으뜸인 곳이라 합니다.
비록 작은 도시지만, 공자가 버티고 있는 한 누가 감히 대적하리오.
공묘, 공부, 공림은 이미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어 있고 중국 정부가 보증하는 A를 다섯 개나 받은 곳이라 하네요.
사실 여행을 하다 보니 중국 정부가 A를 남발한 곳도 보이지만, 여기는 누가 뭐래도 믿을 수 있는 곳이 아니겠어요?
왜?
중국 정부는 믿지 못해도 공자가 보증하니까.
취푸에는 184개의 유명 문물 단위가 있고 그중 중앙정부에서 관리하는 것이 6개 처,
성급에서도 21개 처나 된다고 합니다.
금. 원, 명, 청 시대에 지은 고건축이 1300여 칸이나 되며, 비각이 5.000여 개에 이른다는군요.
아주 풍부한 문화유산이 있는 작은 도시가 바로 취푸라 합니다.
작지만, 강한 놈... 바로 취푸입니다.
그럼 시안의 비림이 비석이 많다고 자랑하던데 번데기 앞에 주름잡고 공자님 앞에 문자 쓴 겨?
이제 앞에 다리 하나가 보입니다.
수수교(洙水橋)라는 이름의 다리입니다.
이 다리는 언제 생겼는지 알려진 자료가 없다고 합니다.
다만, 북송시기에 만든 '노국 지도'에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합니다.
물론, 지금의 다리는 명나라 시기에 새로 만든 것이랍니다.
수수라는 개울은 사실 개울이 아니고 노나라 시기에 만든 성벽 외곽에 파놓은 방어용 해자였습니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생겨 물이 흐르는 개울이 아니라 인공적인 해자라는 이야기겠지요.
취푸(曲阜)라는 곳을 찾아가는 사람 치고 공자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공자가 취푸고, 취푸가 공자가 아니겠어요?
그리고 이곳을 찾은 관광객 대부분이 찾아보는 곳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좌우지간 이 三孔이 취푸라는 도시를 먹여 살린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공자가 없는 취푸란 상상조차 하기 어렵지 않겠어요?
위의 사진은 공자묘통도(孔子墓通道)라는 길입니다.
공자묘로 들어가는 길이라는 말이겠지요.
양쪽으로 나무가 서 있는 것은 번창하라는 의미라 합니다.
죽은 사람에게 번창하라고요?
안으로 들어가며 먼저 양쪽으로 돌기둥이 보이는데 우리가 이미 천안문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두었던
돌기둥인 화표(華表)를 보았습니다.
여기는 꼭대기에는 허우라는 상상의 동물이 없지만...
그러니 화표란 중요지점이라는 의미고 들어가는 입구에 세우는 인테리어 장식이 아닐까요?
그다음에 양쪽으로 있는 동물 중 앞에 보이는 동물이 문표(文豹)라는 표범입니다.
물론, 상상의 동물이 아닐까요?
물어보나 마나 용맹하고 어쩌고 저쩌고 해서 늘 이렇게 들어가는 입구에 만들어 놓았을 겁니다.
생긴 게 아주 늠름합니다.
마치 우리 속에 가두어 둔 것처럼 보입니다.
그다음의 동물은 녹단(甪端)이라는 상상 속의 동물이 지키고 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녹단은 하루에 18.000리를 달리고 사방 각 언어에 능통하며 아무리 먼 곳이 일어난 일이라도
다 알고 있으며 성품이 충직한 동물로 알려졌습니다.
가만히 듣고 보니 사람보다 더 똑똑하군요?
공자께서도 사방 모든 언어에 능통하셨을까요?
이 이야기를 보건대 옛날 중국이라는 나라는 땅이 무척 넓었기에 빨리 달리는 게 필요했을 것이고
또 지역마다 언어가 달라 서로 소통하지 못했기에 자동언어 번역기가 정말 필요했을 것이라는 말이고
먼 곳의 소식을 빨리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모양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다루기 쉬운 동물을 원했나 봅니다.
이런 바람이 상상의 동물을 만드는 게 아닐까요?
지금 과학의 발달로 비행기가 날고 표준어가 만들어지고 그리고 휴대전화의 발달로
이런 모든 소망이 이루어졌습니다.
녹단은 이로써 저는 할 일이 없어 백수가 되었다는 말이겠네요.
그다음에 있는 석상이 옹중(翁仲)이라는 석인상입니다.
아주 오래전에는 주로 궁전의 문 앞에 세워둔 북방 야만인을 모방한 청동 거인상이나 석인상을 말했다 합니다.
그때부터 아마도 북방 오랑캐가 무서운 존재였나 봅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가을을 천고마비라 하여 아름다운 계절로 여겼지만,
중국의 중원에서는 두려운 시기로 여겼다 합니다.
북방의 흉노가 여름 내내 초원에서 자란 풀로 말을 먹여 통통 해지는 천고마비라고 하는 가을이 오면
중원으로 말을 몰아 햇곡식 위주로 곡식을 털어갔기 때문이라네요.
마치 작년에 예약한 듯 맡겨놓은 자기네 물건 찾아가듯 말입니다.
이렇게 나라마다 누구에게는 아름다운 계절이 되겠지만, 또 한편 두렵고 무서운 계절이 될 수 있습니다.
후에는 수염이 긴 남자의 모습으로 변했다지요.
이게 우리나라의 문인상과 무인상과는 어떻게 다르나 모르겠습니다.
전혀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네요.
이번에 보이는 건물은 사당(思堂)이라는 건물입니다.
원래 재청(齋廳)이라고 했지만, 후에 사당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합니다.
사당은 동한 시대에 만들었다 합니다.
사당의 용도는 공자에 대한 제사를 지내기 위해 공 씨 문중 사람 중 제주가 3일 전부터 단식하며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었던 곳이라 합니다.
3일 전부터 단식까지 한다는 일은 아주 힘든 일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우리 같은 사람은 건강검진받으려면 전날 저녁부터 거르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닐진대...
위의 건물은 향전(亨殿)이라는 이름의 건물입니다.
세워진 시기는 명나라 홍치 10년인 1497년이라 합니다.
통도의 제일 마지막에 있으며 공자 묘 입구에 있는 아주 중요한 부속건물이며 주용도는 제를 올리는 곳입니다.
1950년에는 주덕 총사령관이 이곳에서 아주 중요한 군사회의를 했던 곳으로도 유명한 곳입니다.
아마도 공자가 도와주고 보호하였기에 그가 생각한 모든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혁명이 성공한 뒤, 왜 공자 비석부터 깨부쉈어요?
공자의 본명은 공구(孔丘)라 한다네요.
곡부라는 말은 굽은 언덕이라는 말이 아닙니까?
구(丘)라는 이름도 언덕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겠어요?
그러니 공구와 곡부는 무슨 관계가 있나요?
佳人은 공구라면 망치 같은 연장이나 공동구매를 줄여 쓰는 말로만 알고 있는데...
향전(亨殿) 뒤로 돌아가면 바로 공자 묘로 들어가게 됩니다.
형전(亨殿) 바로 뒤에 비각 비슷한 건물을 지었는데 그 안에 비석이 없고 오래도 보이는 나무 등걸이 보입니다.
지붕은 만들어 놓았을 때는 아주 중요한 나무토막으로 보이는데
관리하는 모습이 영 아니네요.
이게 뭡니까?
자공수식해(子貢手植楷)라는 나무입니다.
수종은 황련수(黃蓮樹)라고 합니다.
자공이라 하면 공자의 제자 중 제일 잘난 제자가 아닙니까?
그러면, 자공이 여기에 무슨 짓을 했다는 말일 겁니다.
전설에 따르면 자공은 세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고 합니다.
청나라 초기에 벼락을 맞아 모두 불타버렸고 뿌리 부분만 남았다 하네요.
그때가 1712년 강희년간 51년이었을 겁니다.
번개가 친 후 바닥에 있던 석판이 신통방통하게도 원래 나무처럼 동쪽에 벌떡 서버렸답니다.
그래서 그 석판에 글을 새겨 여기에 기념하였다네요.
위의 사진이 벼락을 맞고 난 후 벌떡 선 석판이라고 하는 벌떡석입니다.
뻘떡주라는 술 이름은 들어보았지만, 벌떡석은 금시초문입니다.
그 벌떡석을 자세히 보면 심을 식(植)이라는 글자에 획 하나가 없습니다.
공자가 돌아가셨을 때 자공은 멀리 출타 중이었나 봅니다.
그러니 공자의 장례식에 천 명이나 되는 제자가 모두 참석했지만, 공자가 가장 아꼈던 자공은 참석할 수
없었기에 자공은 후에 돌아와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면 이곳에 나무를 심고
심을 식(植) 자의 획 하나를 빼어버렸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느낌상 그때 쓴 돌로 생각되지도 않습니다.
중국은 정말 복 받은 나라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렇게 석판마저 이상한 짓을 하며 후에 이야깃거리를 남기니 말입니다.
살다 보니 벌떡석이라는 돌판도 보네요.
여러분도 번개 맞아 벌떡 일어선 석판을 본 적이 있으세요?
젠장, 중국에서는 벼락을 맞아 신통하게도 뻘떡 일어난 벌떡석도 홍위병의 해머에는 당할 수 없었나 봅니다.
그런데 이 말을 가만히 풀어보면 자공이 심은 세 그루의 나무는 2천 년 이상을 죽지 않고 살았다는 말이고
벌떡석은 1712년에 벼락을 맞았다고 했는데 죽은 자공이 2천 년 후에 나타나 글자를 새기며
점 하나를 획~ 하고 빼버렸다고?
몰라~ 몰라~
나도 몰라~~
얼마 전 중국 정부가 중국의 반정부 인권운동가에게 노벨 평화상을 주자 그에 반발해 공자 평화상을 만든다 했지요?
말로만 만들었습니까?
중국에서도 평화를 무척 사랑하는 가 봅니다.
죽은 공자까지 들먹이며 생쇼라도 했나요?
공자와 평화는 무슨 관계인가요?
단지 공자라는 브랜드가 가진 가치 때문이 아닌가요?
공자께서 지하에서 이 소리를 들었다면 뭐라고 했을까요?
귀가 몹시 가려웠을 겁니다.
아무리 짝퉁의 본산이라 하지만, 공자까지 들먹이며 그럴 필요가 있을까 생각됩니다.
비석까지 깨버릴 때는 언제고 이제 평화상이라니요.
위의 사진은 건륭주필정(乾隆驻跸亭)입니다.
건륭황제는 이곳 꽁린을 여러 번 찾아왔다 합니다.
물론 심적으로 공자에 대한 존경심도 있었지만, 사실 만주족이라는 핸디캡이 작용했을 겁니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이웃 민족이었던 몽골족의 원나라가 불과 100년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중원에서 쫓겨나 만리장성 북으로 패주 하는 것을 보았기에 청나라 황제는 문화적으로
문을 숭상한다는 인식을 심어줄 필요가 있었을 겁니다.
그게 변발이라는 앞머리를 밀어버리고 말만 타고 다니는 야만인이라는 인식을 불식시켜야만 하기 때문에
1748년 건륭 13년에 이곳을 왔다고 그 기념으로 세운 정자입니다.
이번에는 강희주필정(康熙驻跸亭)입니다.
강희도 왔다 갔다고 흔적을 남겼습니다.
강희가 족보가 더 빠르다고 공자 묘에서 더 가까운 곳에 정자를 세웠네요.
청나라는 이런 식의 공자를 이용한 이벤트가 성공하여 원나라의 세 배나 오래 중원을 다스렸다면서요?
공자 덕분인가요?
마지막으로 보이는 건물이 송진종주필정(宋真宗驻跸亭)입니다.
그러나 여러 주필정 중 가장 가까운 곳에는 임자가 따로 있었습니다.
송나라 진종이 1008년 제일 먼저 정자를 세워버렸습니다.
그는 태산에서 제를 올리고 돌아가는 길에 이곳을 들려 방문 기념으로 정자를 지어 기념으로 남겼답니다.
끗발이 제일 좋았기에 공자 묘에 가장 가까운 곳에 터를 잡았습니다.
주필(驻跸)이라는 말은 황제의 어가가 머물렀다는 말이 아닐까요?
그러면 황제는 공자의 무덤 앞까지 가마를 타고 들어온 겨?
젠장~ 황제는 가마가 머문 장소도 기념해 정자를 세웠나 봅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국자는 국 맛을 모른다고 했답니다.
佳人이 공림에 와서 공자 이야기를 썼다고 제가 어찌 공자를 알겠습니까?
공자가 佳人을 모르는데 佳人이 공자를 어찌 알겠습니까? 그쵸?
佳人은 슬프게도 단지 국자에 불과했습니다.
오늘의 국자는 이만 쓰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국자는 간만 살짝 보면 안 될까요?
국자는 국 맛은 모르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무던히도 많은 국을 푸기는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