佳人 2012. 6. 19. 08:00

동산 석굴이 있는 산 중턱에 당나라 시기에 대시인이라고 소문이 자자한 백거이(白去易)가 죽치고

살았다는 곳으로 유명한 향산사(香山寺)라는 작은 절이 있습니다.

절이 크거나 화려하지는 않지만, 유명해지게 된 이유가 바로 백거이라는 시인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향산사는 그 절의 효능, 효과보다 백거이 때문에 더 널리 알려졌을까요?

절이 유명해 백거이가 찾은 게 아니고 백거이가 찾았기에 절이 유명해진 건가요?

머리가 우매한 佳人은 이럴 때 도대체 무엇이 맞는 말인지 알지 못합니다.

 

이 절이 향산사란 이름으로 불린 이유가 산 이름이 향산이고 향산에는 향갈나무가 많이 자라기에 그리 불렀다

하며 향산에 절을 지었으니 향산사고 그곳에 말년에 행복한 백수생활을 하며 죽치고 지냈다는 백거이도

향산 거사라 칭했다 하니 오늘 佳人 거사는 향산 거사라는 이름의 유래도 모르고 왔지만,

여기에 오니 모두 알게 되네요.

   

이곳 향산사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처음 용문석굴 입구에서 산 문표를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없으면 여기뿐이 아니라 나중에 들어갈 백거이 묘가 있는 백원에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누구나 들어올 때 표를 사지만, 왜 이렇게 다시 검사하며 시설을 하고 관리하는 사람을 두나 모르겠어요.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인민을 끔찍이도 생각하고 일자리를 더 만들기 위해 이런 짓을 하나 봐요.

베트남에도 톨게이트를 지날 때 표 파는 곳이 있고 그곳을 통과하면 다시 그 표를 검사하는 곳이 있습니다.

우리 눈에는 비효울적이고 인원 낭비라 생각하지만, 그런 나라에서는 그게 당연한 일이기에...

 

향산사로 들어가 반대편인 서산 석굴을 바라보는 풍경이 무척 좋습니다.

여기 위의 사진에 보이는 두 개의 건물이 바로 고루와 종루입니다.

이곳의 향산사의 위치가 기가 막히게 좋아 고도 뤄양의 10대 사찰 중 풍경이 으뜸이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곳 누각은 아주 유명한 곳이라 합니다.

장개석도 이곳 2층 누각에서 50세 생일잔치를 했다고 하니 보기보다는 멋진 곳인가 봅니다.

또 무측천이 자주 찾았다 하고요.

그렇게 영험한 자리라 하니 오늘 우리 부부, 이곳에 온 김에 잔치나 한번 거하게 하고 가고 싶습니다.

 

향산사는 북위 시대인 516년에 건립되었다 합니다.

그러니 1.500여 년을 이곳에 서서 이하를 굽어보고 있었다는 말이 되겠네요.

자신의 왼팔을 잘라 달마대사의 제자가 되었다는 혜가(慧可) 대사가 이 절에서 출가했다고 하며

황제의 자리까지 오른 무측천은 여기서 묵객을 불러 시화대회를 자주 열었다 하니

과연 이곳의 풍광이 나쁘지는 않았나 봅니다.

더군다나 풍류를 안다는 백거이마저 이곳에서 죽치며 시와 술과 거문고와 그리고 친구 8명과 함께

노년을 보냈다니 물 좋고 정자 좋은 곳이 바로 여기였나 봅니다.

 

이강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향산사가 있는 동산과 용문석굴이 주로 있는 서산의 조화가 문화와 풍경에서

기막히게 잘 어울린다 할 것입니다.

유명한 명산이 있고 유명한 사찰이 있고 사람마저 유명한 사람이 있었던 곳이 바로 이곳이 아니겠어요?

물론 유명한 佳人 부부도 여기를 찾았고요.

 

제가 유명하지 않다고요?

왜 그러세요~

저도 이름이 있고 이름이 있다는 말이 유명이 아닌가요?

제갈량 표 학우선을 들었다고 佳人이 제갈량이 될 수 있겠어요? 그쵸?

그래도 폼은 잡을 수 있지 않겠어요?

 

누각에 올라 이하와 건너편의 서산 석굴을 바라보니 풍경이 기막히게 좋지 않나요?

오늘 날씨가 꿀꿀해 좀 그렇네요.

측천무후는 평소에 이 절을 무척 좋아해 자주 찾아왔으며 이 누각의 난간에 앉아 건너편의

석굴 모습을 즐겨 바라보았다 합니다.

오늘 佳人이 무측천이 바라보았다는 바로 그 자리에서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무측천이 바라본 것은 건너편 봉선사의 대불인 노사나불이었을 것이고 그게 자신의 모습이라고 했으니

헐! 자기의 주민등록증 사진을 바라보았다는 말이 아닌가요?

 

그녀는 산수풍경을 좋아해 이곳에서 시화대회를 자주 열기도 했다는데 보기와는 또 다른 면이 있군요?

물론 좋은 방향으로 생각해서입니다.

그러나 무측천은 자신이 큰돈을 내어 이곳 향산사 건너편의 봉선사에 자신의 모습을 본떠 만든 17.4m 높이의

주불인 노사나불(户舍那佛)을 만들었기에 그 모습을 묵객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시화대회를 핑계로

자주 이곳에서 그런 이벤트를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녀의 속을 佳人이 어찌 안 답니까?

맞아요~ 건너편에 있는 주민등록증 사진을 보여주고 싶었나 보네요.

그 대불의 모습은 세상을 모두 품 안에 안아주듯 아주 온화한 모습으로 그 은은한 미소에 무측천도

스스로 반했던 공주병 환자였던 모양입니다.

원래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보며 자기만족에 빠져 사는 사람이 제법 많다고 합니다.

 

현장법사가 천축으로부터 불경을 지게에 싣고 들여올 때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경을 들여와 중국어로 번역함으로 불교문화를 활짝 꽃 피운 인물로 남아 있지요.

택배 시스템이 없어 이렇게 책을 운반하는 지게를 고안해 그곳에 책을 싣고 온 모양입니다.

위의 동상은 향산사 입구에 만든 것으로 아마도 아래 그림을 근거로 하여 만들었나 봅니다.

 

원래 북위 때 공사에 착공했지만, 기자재가 빈약했던 시기라 빨리 끝낼 수 없는 일이 아니겠어요?

그러다 보니 수, 당으로 이어지고 송(宋) 나라에서 겨우 끝났으나, 사실 그 주요 부분은 5세기 말에서

7세기 후반에 이르는 불교미술의 전성기에 조영(造營)되었다 해도 무방할 겁니다.

그렇게 대단한 모습도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지금까지 보아 온 모습으로 남아있습니다.

부처도 세월을 힘에는 자신의 모습이 점차 일그러짐을 어찌하지 못하나 봅니다.

 

이곳 대부분의 불상들이 상처를 받아 흠이 많지만, 이 노사나불만큼은 아직 완벽하리만큼 신기하게도 온전합니다.

거기다가 얼굴에선 온화함이 흘러넘치고 풍만한 상체에선 원만함까지 풍깁니다.

만약에 말입니다.

정말 그게 무측천을 모델로 만들었다고 하면 무측천이 부처의 힘보다 더 세다고 보아야 할까요?

백만돌이보다는 힘이 약하겠지만 말입니다.

이곳에 수많은 부처상보다 훼손이 되지 않고 처음 모습 그대로 남아있으니까요.

 

이번에 보시는 탑은 의발탑(衣钵塔)입니다.

의(衣)는 승려들이 입는 옷을 말하고 발(钵)은 밥그릇을 말한다 하네요.

의발은 출가한 승려에게는 개인 소유로는 가장 중요한 물품이라 합니다.

불가에서는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 가사와 바리때를 전법(傳法)의 의표로 전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의발탑은 탑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라 합니다.

 

제일 아래 건물은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네요.

사천왕상은 우리나라에서는 일주문에 주로 모셔져 있지만, 여기는 방을 따로 만들어 모셔놓았습니다.

 

향산사의 주불은 아미타불이라 하네요.

그래서 전각도 미타보전이라 썼고요.

다른 절처럼 대웅전 앞에는 향나무를 심어놓았습니다.

 

안을 들여다보니 역시 중앙에는 아미타불이 있고 그 옆으로 두 제자가 있는데 하나는 영취산에서 꽃을 든

붓다를 보고 웃었다는 마하가섭이며 다른 하나는 역시 열 제자 중의 하나인 석가모니 사촌 동생인 아난다라 합니다.

그런데 붓다가 꽃을 든 모습이 그렇게 웃겼나요?

가섭은 왜 웃었을까요.

아직도 佳人은 그게 의문입니다.

 

다시 그 옆으로는 협시보살이 있습니다.

불단은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무척 간결하고 소박하게 꾸며놓았습니다.

아미타불과 제자와 협시보살은 모두 하나의 통나무를 조각하여 만들었다 합니다.

 

오늘은 白居易(백거이)가 지었다는 花非花(화비화)라는 아름다운 시로 마무리하렵니다.

왜?

백거이가 여기서 놀았다고 하니까요.

백거이야 당연히 佳人을 오매불망 기다렸겠지만, 지금에서야 찾아왔습니다.

서로 시간을 맞추지 못해 애를 태웠다는 이야기는 물론 이곳에 전설처럼 전해지지 않습니다.

 

花非花(화비화) : 꽃이면서 꽃이 아니고

霧非霧(무비무) : 안개면서 안개가 아니어라.

夜半來(야반래) : 한밤중에 왔다가

天明去(천명거) : 날 새면 떠나가네.

來如春夢幾多時(래여춘몽기다시) : 올 때는 봄 꿈처럼 잠깐 왔다가

去似朝雲無覓處(거사조운무멱처) : 갈 때는 아침 구름처럼 흔적 없이 사라지네.

 

백거이가 쓴 시는 간결하며 정말 아름답지 않나요?

우리의 삶도 이렇게 봄 꿈처럼 잠깐 왔다가 흔적없이 사라지겠지요?

억겁의 세월 중 이렇게 잠시 왔다가는 인간의 삶은 정말 허무합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행복한 사람은 특별한 환경 속에서 따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같은 환경속에서 특별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 했습니다.

백거이가 말년을 이곳에서 행복하게 지내다 여기에 묻히기를 원해 이곳의 귀신이 되었습니다.

그냥 바라보아 평범한 향산사를 백거이는 특별하게 사랑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허무한 인간의 삶도 우리 스스로 특별한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그것 또한 의미 있는 삶이 되지 않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