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장에 핀 연꽃이 화려한 용문석굴
용문석굴 중 어느 석굴 안에는 위의 사진처럼 연꽃이 화려하게 피었습니다.
그곳이 바로 연화동(蓮花洞)이라는 석굴입니다.
석굴 이름 짓기가 무척 쉽습니다.
석굴 안 천장에 이런 화려한 연꽃이 피어있기에 나중에 편의상 붙인 이름이겠지만, 가만히
올려다보니 지금 막 피어난 연꽃처럼 보이고 가운데 연자까지도 세밀하게 사실적으로
표현했는데 이곳에는 많은 석굴 천장에 연꽃 문양이 있지만, 그중 연화동이 최고입니다.
벽에다 새긴 게 아니라 천장에 새겼기에 더 훌륭하다고 생각되네요.
놀라운 것은 연자까지 생생한 모습이 아니겠어요?
가만히 바라보면 지금 막 꽃을 피우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지 않습니까?
제가 너무 오바한다고요?
왜 그러세요?
佳人도 가끔 이런 생각을 하고 마음으로 들을 수 있단 말이에요.
이곳에 서면 누구나 가섭이 아니더라도 미소 한 번 짓고 가면 연꽃이 아침 이슬을 흠뻑 머금고
피어나면 물방울이 댕그르르 굴러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답니다.
용문석굴의 석굴들은 북위(北魏) 효문제(孝文帝)가 다퉁에서 낙양으로 수도를 천도하면서부터
(493년) 공사가 시작된 이후 당나라 시대인 9세기까지 400여 년에 걸쳐
대부분 연속적으로 만들어지게 된 것이라 합니다.
용문석굴은 2000년 11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는데 현존하는 석굴은 2,345개에
총 10만 점이 넘는 불상, 그리고 2,860여 개의 비문이 새겨져 있고
70여 개의 불탑이 남아 있다고 하네요.
아무리 숫자만 많으면 뭐합니까?
온전히 보존된 곳이 많지 않기에 감동하기는 어렵습니다.
여기는 질보다 양으로 승부를 겨루려나 봅니다.
위의 사진을 가만히 바라보세요.
모두 같은 곳이 훼손된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네.. 바로 부처의 얼굴입니다.
이것은 그냥 세월이 흐르며 부서진 게 아니라 사람의 손에 부서진 게 틀림없습니다.
앞으로 이런 모습을 계속 보실 수 있습니다.
세상에 가장 무서운 게 사람이 제일 무섭습니다.
위성사진으로 다시 한번 용문석굴의 위치를 보고 갑니다.
그러니 화살표 방향인 위에서 입구로 들어와 이하를 끼며 서산의 암벽에 벌집처럼 굴을 파고
만든 석굴을 보며 아래로 진행하다 봉선사를 지나면 이하라는 강 건너편으로
넘어가는 다리가 보이면 그곳으로 건너갑니다.
석굴은 강을 끼고 양쪽에 있으나 건너편 동산 석굴은 석굴 조각 인턴이 연습으로 만들다가
그만둔 안타깝게 생각되는 석굴이 몇 개만 있더군요.
동쪽 석굴을 모두 돌아본 시간은 정확히 두 시간이 걸렸고 11시에 북쪽의 다리를 건너기 시작해
1시간 30분 정도 서쪽에 있는 향산사와 백거이 묘를 둘러보면 대부분 볼 수 있는 곳이더군요.
그다음 다시 위의 다리로 건너가면 입구에 만든 공원으로 통과해
처음 내렸던 버스정류장으로 연결됩니다.
뤄양의 용문석굴은 이미 다퉁의 운강석굴을 지루하리만치 자세히 보았기에
대강 훑어보며 넘어가기로 합니다.
자세히 본다고 佳人이 아는 게 무엇이며 느끼는 것은 또 무엇이겠습니까?
모두 空에서 왔으며 空으로 돌아가는 삶인 걸요.
뤄양의 용문석굴은 간쑤 성 둔황 막고굴과 산서성의 운강석굴과 더불어 중국의 3대 석각 예술의
보고라고 했을 정도로 그런 위대한 석각 예술도 이렇게 연이어 보게 되니 그 감동도 반감되나
보며 더군다나 이곳은 운강석굴에 비해 화려함이나 보존상태가 많이 뒤떨어진다고 보이네요.
뤄양시에서 남쪽으로 약 12km 정도 떨어진 석굴로 백거이가 "낙양의 교외 산수의 명승지
중에서는 용문이 최고이며, 용문 10 사찰의 명승지 중에서는 향산이 최고다."라고 했답니다.
중국을 다니다 보면 최고가 아니라는 곳이 없습니다.
사실 돌아보면 수준마저 형편없는 佳人 눈에도 격이 많이 떨어진다는 느낌입니다.
백거이도 믿을 사람이 아닌가 보네요.
아! 백거이가 살던 시절에는 지금과는 다르게 보존상태가 월등하게 좋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백거이가 했다는 최고라는 저 말에 현혹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만약 정말 최고라 생각하고 갔다가 "에게~"하며 실망만 안고 오면 어쩝니까?
그런데 백 거사의 말을 찬찬히 훑어보면 중국에서 최고가 아니라
이 동네에서 최고라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다른 석굴과 비교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니까요.
뭐 좋습니다.
직접 佳人 거사의 두 눈으로 볼 테니까 호들갑 떨지 않아도 백 거사가 한 말이 정말인지
중국식 표현인지 그냥 추천서 한 장 써준다는 기분으로 한 말인지 알게 될 겁니다.
용문이라는 이름은 수나라 때부터 불리기 시작했답니다.
운강석굴의 아우 격으로 석굴 예술의 진수를 보여준다고 하니 기대합니다.
아마도 위의 사진에서 보듯이 석굴을 돌다 보니 석벽에 용문이라는 한자를 새겨놓았더군요.
이 석벽 글자 때문에 이곳을 용문석굴이라 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어요.
용문은 지정학상으로도 요새의 모습으로 외부의 침략에 잘 대항할 수 있어 궐새(闕塞) 혹은
이궐(伊闕)이라고 불렀고 빈양 삼동의 외벽 북쪽으로는 위의 사진처럼
"이궐불감지비(伊闕佛龕之碑)"라는 비석이 하나 서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비석은 사라지고 그 모습을 찍은 사진이군요.
비석 상단을 보시면 마치 나무로 조각한 것처럼 화려하게 새겼고 그 아래에는
"이궐불감지비"라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비석이 바로 그 유명한 당나라 때 대서법가인 저수량의 작품이라는
"이궐불감지비"라는 것이라네요.
지금은 원본은 사라지고 사진으로만 남겨두었습니다.
원본이 있다고 佳人이 글을 읽겠어요?
아니면 잘 썼는지 못 썼는지 알겠어요. 그쵸?
저수량이 쓴 글 중 남아있는 가장 큰 글자라 합니다.
저수량은 당나라 때 4대 서법가 중의 한 사람이라 하더군요.
그러나 지금은 비석은 어디로 사라지고 그 사진으로 만든 것을 걸어놓았습니다.
사진 뒤로 보시면 상단의 조각은 그대로 남아있는 게 보이는군요.
용문산은 건너 편의 향산과 강을 사이로 마주 보고 있습니다.
이수(伊水)가 북쪽으로 돌며 흐르는데 멀리서 보면 마치 천연의 성문과 같습니다.
흐르는 강이 마치 용이 천천히 꿈틀거리며 흐르는 모습으로 생각되기에
그래서 용문이라고도 부르나 봅니다.
그 강을 따라 양쪽이 마치 벌집처럼 조성되어 있습니다.
북위가 다퉁에서 이곳으로 도성을 옮기며 시작했으니 대동의 운강석굴과는
형님 아우 하는 사이가 되나요?
북위는 석굴을 파고 불상 만드는 재주가 탁월했나 봅니다.
한족이 문명인이라 하지만, 석각 예술에서는 북위에 미치지 못했나 봅니다.
한족이 잘하는 게 뭘까요?
과대포장에 억지를 부리기와 우기기일까요?
용문석굴은 북위 효문제부터 파기 시작해 동한, 서위, 북제, 수, 당, 북송 등 여러 왕조를 거치며
400여 년 동안 만든 것입니다.
얼마 전 터키의 카파도키아를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도 바위를 뚫고 사람이 살았거나 교회도 만들어 종교박해를 견디며 수도한 흔적도 보았고
암벽에 비둘기 집을 지은 모습을 보고 마치 벌집이라 생각되었는데 이곳도 그렇군요.
위의 사진을 보시면, 감실 위에 멋진 지붕을 만들고 용마루까지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금시조라는 새가 지붕 한가운데에서 날개를 활짝 편 모습입니다.
중국에서 금시조라는 새는 사실 인도 신화에 나오는 가루다를 말하는 게 아닐까요?
용을 주로 잡아먹고 산다고 하니 하는 짓이 똑같으니까요.
중국이 지정학적으로 우리보다 먼저 서구나 인도 문화를 받아들였을 것이고 우리가 중국을
통하여 들어왔으니 굳이 과거 우리나라가 문화적으로 조금 처진다고
절대로 부끄러워하고나 비하할 일도 아닙니다.
당시는 모든 교류가 육로나 바다를 통하였기에 중국을 거쳐서 우리나라로 오게 되어있지요.
세상이 바뀌니 지금은 오히려 우리의 한류가 세상으로 번져나가잖아요.
위의 사진에 보이는 금시조는 돌출형으로 만들었네요.
석벽을 다듬어 저런 모습의 돌출 석각을 만든다는 게 당시로는 쉬운 기술은 아니었을 겁니다.
주로 용을 잡아먹고살며 인간의 몸체에 독수리 머리와 부리, 날개와 발톱을 지녔다고 알려졌지요.
가루다는 인도 신화에 나오는 위대한 3 신 중 하나로 세상의 질서유지를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비슈누의 자가용일 겁니다.
비슈누의 자가용이라는 가루다를 한번 보고 갑시다.
이번 기회에 가루다를 풀 옵션으로 한대 뽑아 타고 다니고 싶군요.
비슈누는 지금까지 아홉 번을 변신하며 인류를 지켰다고 하며 아홉 번째가 바로 부처의 몸으로
세상에 나타나 인류를 구하는 일을 했다고 하는데 세상이 혼탁해지면 또 새로운 아바타로
세상에 나타나 늘 인간세상을 정화시키는 일을 했다고 하네요.
이번에는 가루다를 단체로 집합시켰습니다.
멀리서 보면 단체로 손들고 벌서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쟤들은 원래 만세 부르는 저런 폼으로 놀고 있습니다.
저기는 아마도 가루다 주차장인가 봅니다.
이제 이 세상이 다시 혼탁해지면, 열 번째 화신으로 변하여 다시 세상에 나타날 텐데...
그 이름이 백마 탄 초인의 모습인 칼키라는 아바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합니다.
우리의 이육사 님이 광야라는 시에서 노래한 천고의 뒤에 나타날 백마 탄 초인이
아마도 같은 초인이 아닐까요?
그러면 지금까지 타고 다녔던 저 금시조는 폐차 처리할 건가요?
비슈누는 가루다를 타지 않고 백마만 타고 다닐 게 아닙니까?
그때는 중고 가루다가 엄청 쏟아질 겁니다.
그때 저렴한 가격에 풀 옵션이 탑재된 것으로 한 대 불하받고 싶습니다.
비슈누가 지금까지 아홉 번이나 새로운 아바타로 세상에 나타나 혼탁한 세상을 구했다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인간세상은 아주 오래전부터 혼탁하고 지저분하게 살았다는 말이 아닙니까?
한 번의 새로운 아바타가 나타날 때의 시간이 수백억 년이라고 하는데 정말 우리 인간은
영원히 구제받기 어려운 존재인가 봅니다.
요즈음 수도자마저도 하는 짓이 빠떼루 받을 뻘짓을 하니
그 시기가 가까워지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이것도 살아있는 금시조일까요?
오늘 비가 내리고 날이 추우니 산새가 감실 안에 비를 피하고 있습니다.
추위에 떠는 새를 부처가 따뜻한 품으로 품어주나 봅니다.
부처의 자비가 추위에 떠는 새마저 안락하게 하여 줍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신라 김수로왕의 부인인 허황옥이 바로 인도의 아유타국이라고 추정되는
아요디아에서 왔다고 했으며 그녀는 아유타국의 공주였다고 했지요.
바로 그곳이 비슈누의 7번째 화신인 라마 왕자가 태어난 나라이고 비슈누의 9번째 화신인
부처가 처음으로 출가하여 공부한 유서 깊은 도시가 아요디아입니다.
만약, 라마와 부처가 같은 비슈누 신의 화신이라면 그 나라인 아유타국 허황옥 공주도
분명 연관이 있다고 해야 할 겁니다.
허황옥은 배를 타고 주포촌이라는 지금의 창원지방에 상륙했다는데 만약 가루다를 타고 왔다면....
그리고 타고 온 가루다를 어디엔가 감추어 두었다면....
인도라는 나라는 지금도 무척 멀리만 느껴지는 나라인데
당시에 그곳에서 우리나라까지 올 때는 아마도 가루다를 타고 왔을지 모릅니다.
김 수로왕의 신화에 얽힌 구지봉이나 구지가등을 보면 유난히 거북이와 관련이 깊습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만드신 거북선은 입에서 불을 뿜었습니다.
마치 가루다가 입에서 불을 뿜듯이....
혹시 거북선을 건져보면 그 안에는 가루다가 한 마리씩 들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가루다...
먼 나라의 신화 속에만 나오는 상상의 동물이 아니라 바로 우리나라 어디엔가
숨어 사는 동물일 수도 있습니다.
신화도 허황한 이야기지만 佳人의 상상도 허황한 이야기고 허황옥도 허황한 이야기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