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여행기/산서성(山西省)

윈펑스(雲峰寺 : 운봉사)에 매달린 방울.

佳人 2012. 4. 7. 08:00

운봉사는 자연적으로 생긴 바위 속에다 절을 지었습니다.

그 바위 모양이 마치 어머니 뱃속과 같다고 하여 처음에 포복사라고 불렀다 합니다.

아마도 어느 날 하늘이 열리며 면산이 쩍 갈라지며 그다음 이곳에 운봉사를 지으라고

동굴이 자연적으로 생겼나 봅니다.

하늘은 이렇게 미리 운봉사 절터를 예정하였나 봅니다.

 

그 바위의 모습은 바라만 보아도 영험한 기를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동굴도 아니면서 안으로 둥글게 움푹 파인 모습은 기이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장인이 아름답게 파낸들 이러하겠습니까?

세상을 만들고 움직이는 힘이 바로 어머니의 뱃속입니다. 

 

그런데 바위 입구 천장을 올려다보면 방울을 매달아 놓았습니다.

천장 밖으로 매달린 방울을 보면 사람은 빌고 싶은 게 무척 많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저런 위험한 곳에 달아놓았을까요?

행운은 위험에 비례하는가 봅니다.

그렇지요.

공짜 점심은 없다고 했습니다.

 

지금 위의 사진을 눈여겨보세요.

이번에는 운봉사 천장을 올려다보면 사진처럼 이상한 문양이 보입니다.

여러분은 위의 사진에서 무엇을 찾으실 수 있나요?

오늘은 숨은그림찾기나 해 볼까요?

佳人이 오늘 여러분에게 숙제를 하나 드렸습니다.

답은 나중에 제일 아래에서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처음에는 위나라 황제인 명제의 명을 받은 고승인 적공(迪公)이 이곳에 사찰을 짓기 시작해

그 후 북위 시대에 중국 전역으로 불교를 전파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합니다.

북위라 하면 도교를 국교로 하다가 담요라는 고승이 왕의 5대조부터 미륵이었다는 말로

용비어천가를 부르며 한방에 도교를 끝내고 불교로 개종케 했다는 나라가 아니겠어요?

그래요. 석굴 전문 국가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나라가 북위라 했나요?

다통의 윈강석굴을 만든 북위의 유명한 담요라는 고승도 이곳에서 설법하고

정토종을 세웠다고 알려졌습니다.

이 정도라면 이곳의 영험한 기운을 이미 여러분도 눈치채셨을 겁니다.

 

당나라 초기 때, 중국 최초의 부처라 일컫는 지초(志超)가 이곳에 머물며 불교를 설파하고

수도 정진하며 건강을 유지하며 살았다 하네요.

그는 죽은 다음 공왕불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고 면산에 처음으로 등신불이 되었다 합니다.

이래도 영험한 기운을 느끼지 못하시겠다면, 직접 면산을 가시는 길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좌우지간 이곳에서 수양하고 설법한 사람 중에 못난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그만큼 이곳은 효험이 있는 절인가 봅니다.

그 영험함은 바로 면산의 기가 이곳 동굴로부터 나오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바로 어머니의 뱃속과 같은 모습이니까요.

 

또 이런 이야기도 들립니다. 

당태종 14년에 큰 가뭄이 들었는데, 면산에만 비바람이 순조로워 사람들은 고승인

지초 스님이 계시기 때문이라 했답니다.

도탄에 빠진 민초의 슬픔을 덜어주고자 당태종은 면산에 있다는 지초 스님에게

사람을 보내 방법을 구합니다.  

당태종의 비서실장이 지초 스님을 만나 여차저차, 저차여차 하며 비를 구하자, 지초 스님은

제자에게 명하여 쌀뜨물을 서남 방향으로 휙~ 하고 뿜으니 장안 일대에 단비가 내렸다네요.

환장할 일이지만, 비를 내리는 일이 이렇게 쉽고 간단하다니...

 

정말 왜 이러십니까?

지금 제가 쓴 글을 읽고 비웃고 계시죠?

이번에는 쌀뜨물 가지고 장난하십니까?

여기서 장안이 어딘데 지초 스님도 아닌 제자는 쌀뜨물에 헬기라도 달았답니까?

아니면 토마호크 미사일에라도 달고 날렸답니까.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지초 스님은 원적에 들게 되었답니다.

너무 힘을 많이 쓰셨나 봅니다.

보세요.

쌀뜨물의 부작용이 나타나잖아요.

너무 오버하셨어요~

지초 스님은 그러시는 게 아니셨습니다.

그런데 제자 보고 쌀뜨물을 뿌리라 하고 지초 스님이?

 

원적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쌀뜨물 사건도 있고 하여 당태종은 군신을 이끌고

지초 스님을 만나려 면산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스님의 제자들이 스님의 원적을 알리자 당태종은 탄식 후 “이번 행차는

공염불(空念佛)이다.”라고 했고 이때 신기하게도 하늘에는 ‘공왕고불(空王古佛)’이라는

네 글자와 지초 스님의 모습이 나타났답니다.

울랄라?

이번에는 또 하늘이?

지금 묘기 대행진 하는 겁니까?

중국의 하늘은 정말 타이밍도 좋게 신통방통합니다.

지금 신중국에서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신기한 일이 이때는 수시로 일어났습니다.

 

당태종은 이를 보고 지초 스님을 공왕불(空王佛)에 봉하고 조서를 내려 운봉사를 짓게 했다는

전설의 고향다운 이야기도 들립니다.

뭐 중국이니까 이 사실도 믿어야 합니다.

중국에는 불가능이란 없습니다.

지금도 중국 정부가 하는 짓을 보면 불가능이 없습니다.

세상의 뻘짓은 혼자 다하고 문명을 이야기하는 나라니까요.

 

 면산을 걷다 보면 절벽에 매달린 종을 여러 곳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이 종의 유래도 당태종 이세민과 연관이 있다고 합니다.

이세민이 어느 아름다운 가을날 면산을 방문하여 지초 스님을 만나려 하자 그의 문 앞에는

"부재중"이라는 푯말만 붙었다 합니다.

 

미리 연락하지 않고 왔으니 황제 아니라 황제 할애비가 와도 자리에 없으면 만나지 못하잖아요.

황제는 너무나 먼 길을 왔기에 뻘쭘해 그냥 돌아가기도 그렇고, 마냥 기다린다는 일도 그렇잖아요.

그래서 포복암 절벽에다 방울을 매달게 했답니다.

그런데 지가 달면 될 텐데 황제인 자기가 올라갔겠어요?

 

황제는 심심해서 하라고 했지만, 그 종을 매다는 사람은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그런다고 진급을 시켜주겠어요?

봉급을 올려주었겠어요.

그러다 떨어져 죽으면 국립묘지는 고사하고 거적도 덮어주지 않고 협곡 아래에다 던져버렸겠지요.

가족에게 보훈 연금도 주지 않았을 것 아니겠어요?

 

이게 지금의 방울을 달아 행운을 기원하는 풍습으로 자리 잡았다 합니다.

그러니 이 풍습도 천여 년이 넘은 오래된 풍습입니다.

생긴 모양은 석벽에 달라붙은 박쥐처럼 생겼지만, 방울이 맞습니다.

 

웃기는 전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사람 만나러 왔다가 닫힌 문만 바라보다 종을 달았다 하고는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삼각관계라도 맺게 해 줄까요?

전혀 앞과 뒤가 맞지도 않은 말이지만, 여기는 중국이라는 곳입니다.

 

운봉사는 워낙 영험한 기운이 감도는 곳입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이 이곳에 와 소원을 빕니다.

어때요?

여러분도 영과 통할 것 같습니까?

느낌이 드신다면 이제 하산하실 시간이 가까워졌습니다.

그러나 너무 가까이 가시다 보면 작두 타는 일도 생길지 모릅니다.

 

처음에는 이곳에 와 소원이 이루어지길 기다린다는 의미에서, 기다릴 등(等)과 발음이 같은

등불(燈) 달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런 일은 우리에게도 절에 가서 등을 다는 것과 같이 무척 익숙한 일이잖아요.

그러나 여기는 그것으로 끝내지 않고 마침내 그 소원이 이뤄졌을 때, 다시 운봉사를 찾는답니다.

확실한 A/S까지 하려나 봅니다. 

 

이번에는 신선이 영험하다는 의미의 영(靈)과 방울 영(鈴)의 발음이 같으므로

이렇게 소원이 이루어진 후에 다시 찾아와 방울을 달고 간답니다.

소원을 이룬 자가 직접 방울을 단다고요?

왜 그러세요~

그러다 정말 영과 함께 아주 영원히 살아갈 일이 있습니까?

 

물론 돈을 주면 전문가들이 몸에 밧줄을 묶고 위에서 내려와 방울을 달아줍니다.

돈만 주면 이렇게 대신 신을 만날 수 있답니다.

그런데 왜 땀 흘리며 힘들게 여기까지 와 소원을 빌까요?

머슴 보고 대신 이곳에 가 빌어달라고 하지?

 

지금은 심부름센터에 맡기면 되겠지만....

중국에서는 비는 일도 직접 하지 않고 남을 시켜도 효과가 있나 봅니다.

차이나라는 나라는 역시 뭐가 차이나도 차이나나 봅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아까 보여 드린 사진은 지초 스님의 수장인(手掌印)의 흔적이라 합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동굴 지붕에다가 손으로 턱~ 허니 손바닥 도장을 찍었다는 말입니다.

진흙도 아니고 바위로 된 곳에다 말입니다.

 

정말 왜 이러십니까?

우리 부부와 함께 이곳을 걸어온 중국인도 웃는 일을 지초 스님이 하셨답니다.

얼마나 무안했으면 그 청년이 웃고 있는 우리 부부를 바라보고 계면쩍게 싱긋 웃었겠어요.

지금까지 佳人의 가슴에 남은 수장인은 오직 한 분....

안중근 의사의 수장인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