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여행기/산서성(山西省)

서덜마을 치커우 사람의 사는 방법

佳人 2012. 3. 9. 08:00

 

황허는 넓은 폭을 자랑하며 흐르다 치커우에 이르면 갑자기 좁아지며 개울물처럼

수많은 돌 틈 사이로 흐르는 곳입니다.

이 마을의 이름인 적구(碛口)의  적(碛)은 모래와 자갈이 있는 여울이라는 의미의

서덜 적이라는 글자입니다.

황허의 물이 넓은 곳을 흐르다 자갈이 있는 여울로 들어서는 입구라는

의미로 마을 이름을 지었나 봅니다.

 

이 부근 마을 대부분이 주민의 성씨를 마을 이름으로 하였지만,

이곳은 치커우(碛口 : 적구)라고 한 이유가 밝혀졌습니다.

상류로부터 물자가 배를 타고 내려오다 이곳까지만 올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 마을이 바로 교역의 중심이 된 게 아닐까요?

 

 

지금이야 다른 곳으로 도로가 생기며 모든 물자가 더 편리한 트럭을 이용하여

운반되어 이 마을은 잊힌 마을로 가끔 관광객이나 찾는 마을이 되었지만,

명, 쳥 시대는 이 작은 마을이 어마어마했답니다.

바로 황허를 이용한 교통의 중요한 중간지점으로 많은 물류가 이곳을 거쳐 동서로

교류했고 물길을 이용해 황허를 타고 내려온 물자가 이곳을 통하여

핑야오나 베이징으로 갔다고 하니까 말입니다.

 

 

황허 기슭의 첫 동네 치커우라는 마을은 수심 깊은 물이 이 마을까지

유유히 흘러 천혜의 물길이 만든 마을입니다.

그 때문에 청(淸)왕조 때부터 1930년대까지의 백 년 동안 치커우는 수륙 수송에

힘입어 경제의 호황을 이루었다 합니다.

그러니 마을에는 돈 냄새가 진동했고 여기저기 돈 세는 소리로

아침을 시작해 날이 저물었을 겁니다.

강아지마저도 입에 돈을 물고 돌아다녔을 겁니다.

물론 핑야오의 강아지는 환을 물고 다녔겠지만...

佳人이 조금 오버했지요?

 

 

황허 기슭에 자리하다 보니 집은 와호산 기슭에 켜켜이 자리하고

어떤 집은 토굴을 파고 들어가 살기도 했다네요.

워낙 집을 지을 땅이 부족하니 이 마을의 재미있는 집 짓기가 있다네요.

그러니 아래 먼저 지은 집의 지붕은 위의 지을 집의 마당이 되어야 합니다.

위의 집은 좁은 공간에 집을 지어야 하니 마당도 없어 아랫집의 지붕을 마당으로 사용합니다.

심지어 골목길도 자기 집 아래로 터널을 만들어 드나들게 했습니다.

 

 

마당의 문은 대부분 왼쪽으로 나 있는 게 특징입니다.

그 이유는 비탈에 올려지었기에 문을 앞으로 낸다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앞마당은 바로 아랫집의 지붕이니까요.

그러다 보니 집은 앞에서 볼 수 없고 대문에서 비스듬하게 보입니다.

마당에는 감자나 무, 고구마를 저장하는 움을 파기도 합니다.

 

 

그리고 좌청룡 우백호의 풍수설에 따라 마당의 양쪽에 건물을 두었습니다.

왼쪽에는 방아를 두고 오른쪽에는 맷돌을 대부분 두었습니다.

주로 거주는 안채에서만 하고 별채는 주로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로 사용합니다.

안채와 별채는 안쪽에는 처마를 만들지 않고 오히려 외벽에 처마를 만들어

빗물로부터 벽채를 보호하는 게 이채롭습니다.

 

 

안채와 별채 사이에 부엌이 있고 위에 지붕을 만들어 굴뚝을 뽑아내고

여름에는 주방으로 사용한다 합니다.

안채와 별채에는 온돌을 만들어 부엌 겸 사용하여 겨울에 난방도 하고 밥도 한다고 하네요.

건물이 2층일 경우 옥상에 베란다를 만들어 위층 집의 마당으로 사용하게 합니다.

  

 

세월 속에 빛바랜 문과 반들반들한 우물가, 세월의 때가 고스란히 내려앉은 듯한

우중충한 건물, 길거리에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마을 사람을 바라보노라면

마치 수백 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답니다.

이런 마을을 돌아다니다가 담장 너머를 슬쩍 넘겨다 보면

마치 佳人도 명나라로 돌아간 기분입니다.

골목길에서 두런두런 옛날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듯합니다.

오늘 佳人과 함께 "백 투 더 퓨처" 해보지 않으시겠어요?

 

 

북에서 남으로 도도하게 흐르던 황하는 치커우에 이르면 옆구리를 치고 들어오는

 추수하(湫水河) 때문에 그 속도에 타격을 받습니다.

그 이유는 황토 고원을 흐르며 많은 퇴적물을 싣고 와 이곳에 부려놓았기 때문에

강바닥이 갑자기 높아졌기 때문이죠.

그러한 이유로 신중국의 대장정이 있었을 때 붉은 깃발을 앞세우고

바로 이 여울을 통해 넘어갔다고 이 마을 사람들은 자랑스러워한답니다.

우리가 묵은 숙소 이름이 바로 홍기 여관입니다.

 

 

치커우의 옛 거리는 바로 추수하를 따라 와호산(臥虎山) 기슭에 조성되었고 청석을

깔아놓은 거리 양편으로는 높이 올라앉은 건물들이 옛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치 세월이 이곳만 비켜 지나간 것처럼 말입니다.

이 마을의 골목길을 걷다 보면 명, 청대의 옛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동네 사람에게 물어보면 나라님이 주원장이나, 옹정, 강희제를 입에 올릴지 모릅니다.

우리 부부는 이런 오래된 마을 골목길 걷기를 좋아합니다.

눈으로 본 옛 모습과 그리고 마음으로 읽는 그때의 삶을 넘겨다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황허 물이 누렇기에 강 이름이 황하라고 불렀을 겁니다.

황하가 흐르는 지역은 대부분 이런 황토로 된 지역을 지나기 때문일 겁니다.

황토는 쉽게 굴을 파낼 수 있고 황토 또한 우리 인간에 유익한 작용을 하는 흙이잖아요.

그러니 바로 이런 집이 친환경 집이 아닌가요?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쉽게 집을 지을 수 있으니 이 또한 오래전부터

이곳에 사는 사람에 의해 이용되었겠지요.

사람은 그 지역에서 가장 구하기 쉬운 것이나 만들기 쉬운 방법으로 집을 짓습니다.

지난번 구이저우 성을 돌아보았을 때 그곳에는 삼나무가 잘 자라는 지역이라

나무를 이용하여 집을 짓더군요.

그러다 보니 고루도, 풍우교도 모두 나무로 이용하여지었더군요.

 

 

그러니 이곳은 겨울에 나무로 집을 짓고 산다면 무척 추위로 고생하지 않았을까요?

원래 토굴집이 계절에 따라 기온 차이가 작잖아요.

지금은 사람이 사는 곳도 있고 이미 폐가가 된 토굴집도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집의 출입문이 토굴집은 모두 아치형으로 만들었습니다.

그게 힘을 분산시키며 더 안전하다는 것을 이미 이곳에 사는 사람은 본능에 따라

 알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토굴집도 아니고 그냥 콘크리트로 지은 집도 출입문을

대부분 아치형으로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사람인 이렇게 살아가면 알 듯 모를 듯 그대로 배워가나 봅니다.

 

 

우리가 토굴이라고 하는 집은 이곳에서는 요동(窯洞)이라고 부르지요.

이 또한 인간이 그 지방에 적응하는 지혜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중국인이 자주 쓰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아마도 우공이 산을 옮기려고 마음먹었다면 단단한 돌산이 아니고 황토로 된 부드러운

산일 것이며 만약, 기주의 남쪽과 하양의 북쪽 사이에 있다는 태항산(太行山)과

왕옥산(王屋山)이 돌산이었다면 우공은 글자 그대로 어리석은

돌대가리 영감탱이였을 겁니다.

옥황상제가 우공에게 도와주지 않고 등골 뺀다고 빠떼루를 주었을 겁니다.

 

 

이 지방 대부분 집은 산의 모양을 따라 굴을 파고 토굴집을 지은 곳입니다.

겨울에는 당연히 덜 춥고 여름에는 시원할 겁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주거형태도 참 다양합니다.

 

나무가 많이 나는 곳에서는 조각루라는 나무집을 짓고 살아가고 황토 고원에는

진흙 벽돌을 쌓아 집을 짓고 완펑린처럼 돌이 흔한 곳에 사는 부이족은

돌로 집을 짓고 삽니다.

이곳은 비탈에 파기 쉬운 황토로 된 흙이기에 그냥 파고 들어가 살면 집이 됩니다.

"쇼생크 탈출"처럼 숟가락으로 파고 들어가 살 정도가 될 겁니다.

 

 

그렇다고 그냥 원시인처럼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건물의 조벽과 문루와 처마와 창틀에까지 벽돌이나 나무를 아름답게

조각하여 한껏 멋을 냈습니다.

아무리 이런 곳에 살아간다 해도 예쁘게 꾸미고 살아가는 것은 어디나 마찬가지입니다.

 

이곳에서 가장 겁을 내는 일은 바로 무너지는 일입니다.

토굴을 파고 집을 지었기에 비로 말미암아 무너진다면 도루묵입니다.

그래서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 바로 배수시설입니다.

 

 

위의 사진은 황허의 물을 직접 길어 쓰는 우물입니다.

아마도 영원히 물이 마르지 않을 곳처럼 생각됩니다.

만약, 이 우물의 물이 마르는 날은 중국이라는 나라는 지구 상에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중국이 자꾸 순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면 하늘이 화딱지가 나 황허의 물을

모두 사라지게 할는지 모릅니다.

  

 

이 마을에는 교역의 중심지였기에 다운타운도 있습니다.

요동이라 부르는 토굴집만 있는 게 아니라 반듯하게 지은 집도 무척 많습니다.

지금은 치커우 전력공사로 변해버렸지만, 이 집의 옥호는 영풍점(永豊店)이라는 가게 터였습니다.

오래도록 풍요롭기를 바라고 상호를 지었건만 지금은 전력공사가 주인행세합니다.

 

 

지금이야 모두 빛바랜 사진처럼 변해버렸지만, 잘 나갈 때는 무척 많은 사람이 붐볐을

곳으로 제법 돌로 튼튼하게 제대로 만든 마을도 있습니다.

마당을 가득 메운 낙엽이 예전에 무척 잘 나갔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듯합니다.

우리 부부가 바로 가을의 중심에 이 마을을 다녀왔습니다.

 

 

위의 사진처럼 많은 짐꾼이 드나들었을 문도 보입니다.

우리의 덜수가 괴나리봇짐을 짊어지고 저 문을 들어서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는 모습이 오버랩됩니다.

오늘 이곳에 괴나리봇짐을 부리고 하루를 유하며 흐미~~ 탁배기 한 잔을 들이켠다면

세상에 부러울 게 없을 겁니다.

덜수는 밍월이가 있다는 치커우 주막에 자꾸 눈길이 가는 이유는 뭘까요?

 

추수하를 따라 위로 조금 올라가 치커우의 뒤쪽에 이르면 삼면이 산에 둘러싸여 있고

한쪽으로는 물을 마주한 작은 동네가 보입니다.

추수하가 서쪽으로 굽이를 돈 곳에 있는 이유로 이 동네는 이름이 서만촌(西灣村)이라네요.

 

 

그리고 1층의 지붕은 2층의 뜰이고 뜰마다 작은 문으로 서로 연결되어 뜰과

뜰이 연결되고 골목과 골목이 이어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한 뜰에만 들어서면 작은 문과 골목을 통해 마을 전체를 다 볼 수 있습니다.

마을이 모두 하나의 골목으로 드나들고 그것은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일을 합니다.

이렇게 이곳에 사는 사람은 모두 하나의 끈으로 끈적이며 살아온 모양입니다.

 

 

바로 모퉁이를 돌아가면 이가들의 집성촌인 이가산이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이가산은 봉황 모양의 건물 군락이라고 합니다.

이제는 佳人도 봉황이라고 해도 그냥 웃으며 다닙니다.

용이라도 우습게 생각하고 다니는데 하물며 봉황 정도야...

봉황 할애비가 온다 해도 이제는 우습지도 않습니다.

 

 

이 씨들이 모여 사는 산동네이기에 이가산(李家山)입니다.

이가산촌은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무덤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황토흙을 파고 움집처럼 집을 꾸민 황토토굴입니다.

이런 모습을 예전에 돌궐족이 사는 터키를 갔을 때 카파도키아라는 지역에서 본듯한 곳입니다.

 

 

봉황새의 날개 같은 두 산 언덕에 사람이 모여 사는데 그러니 봉황이 날개를

활짝 편 모습의 양 날개와 머리 부분에 사람이 토굴을 파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중 오른쪽 언덕에는 청나라 시기에 지은 건물이 온전하게 남아 있습니다.

여기에 있는 건물에는 크고 작은 마당이 백여 개가 남아 있고 방의 숫자가 400칸이나 된다 합니다.

 

 

이 부근에 사는 사람은 세상에 태어날 때 황토 흙을 파고 만든 토굴 속에서 태어났고 세상에

큰 울음으로 태어났음을 알린 아이는 황토 토굴 앞에서 황토흙으로 장난감을 빚어 만들고 놀며

자랐으며 마을 옆으로 흐르는 중국에서 어머니의 강이라 부르는 황허의 물을 먹고 살아갑니다.

어른이 되면 황토흙 위에서 결혼하고 황토흙으로 만든 요동이라는 방에서

신랑 각시가 되어 사랑을 나눕니다.

그리고 다시 황토흙으로 만든 방에서 아이를 낳고 키웁니다.

그 아이는 또 황토에 곡식을 심고 추수하여 먹고 삽니다.

 

그리고...

죽으면 다시 황토로 돌아가 황토의 일부분이 되어 티끌로 사라집니다.

이들에게 황토란 어머니의 품이고 어머니의 눈물이고 삶의 모든 것입니다.

황토란 바로 이들의 삶이며 영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늘은 장시간 버스에 시달렸으니 일찍 코~하고 자렵니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 황허와 함께 살아왔던 마을의 아침 모습을 살펴보렵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빛바랜 사진처럼 치커우 사람이 넉넉하게 살아가는 것은 부자이기 때문이 아닐 겁니다.

그들은 특별히 간절히 원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맞아요, 원하는 게 없기에 넉넉한 마음으로 살아갈 겁니다.

 

명품 가방도, 얼굴을 예쁘게 만들어 준다는 화장품도, 명품으로 가릴 옷도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소유해야만 부자라는 생각은 어리석은 생각이 아닐까요?

황토에서 빈손으로 태어나 행복하게 살다가 빈손으로 황토로 돌아가는 삶에 무슨 물욕이 있겠습니까?

마음을 조금만 비우고 나면 세상이 넉넉한데 佳人은 너무 욕심을 내지는 않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