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먼스쿠 펑씨엔스(용문석굴 봉선사)
오늘은 용문석굴의 하이라이트라는 봉선사를 요모조모 뜯어보렵니다.
그러나 뜯어보려 했으나 절은 이미 모두 뜯어져 노천에 있네요.
수많은 용문석굴 중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석굴은 당나라 측천무후 때 만든
봉선사(奉先寺) 석굴로 아주 우아한 모습입니다.
첫인상이 지금까지 보아왔던 부처의 얼굴이 아니라 마치 후덕한 여인의 모습으로
다가오는데 석불의 모양도 아름답지만, 그 크기에 있어 용문석굴에서는 가장 큰 석불입니다.
이런 일로 말미암아 봉선사의 부처는 측천무후라는 말도 있더군요.
실제로 측천무후는 생전에 자신을 미륵보살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뭐.. 그런 생각으로 산 사람이 측천무후 말고도 세상에 제법 있더군요.
만약 그런 마음으로 봉선사를 만들었다면 봉선사는 맹구가 잘 나가던
봉숭아 학당이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무측천이 아마도 이곳에 석불을 만들며 자신의 이미지를 슬쩍 하려고 한 것은 아니겠죠?
사실은 봉선사란 당 고종이 태종을 추모하기 위해 약 4년간 만들었다 합니다.
그래서 이름도 선대를 기린다는 의미로 처음부터 일부에서는 봉선사(奉先寺)라고 하다가
아예 이름도 개명해 지금은 봉선사로 부른다 하더군요.
원래 봉선이라는 말은 봉선사효(奉先思孝), 접하사공(接下思恭)이라고 쓴
서(書), 태갑(太甲)에서 따온 말이라 합니다.
봉선사...
조상을 기린다는 의미이니 이 얼마나 기특하고 아름다운 이름입니까?
원래 처음 오리지널 이름은 대노사나상감(大卢舍那像龛)이라고 했다더군요.
당 고종 초인 함형(咸亨) 3년인 672년 황후 무측천이 이 대불을 짓는데
크게 지원했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답니다.
그런데 선대를 기리기 위해 만든 석불을 설마 자신의 이미지로 둔갑이야 했겠어요?
불상 건축에 크게 지원을 했기에 모습으로 보아 무후의 모습인 여자로 보이지 않습니까?
봉선사는 용문석굴의 백미입니다.
원래 석굴 앞으로 지붕을 잇대어 반듯한 사찰로 건물을 지었으나 지금은 모두
티끌로 사라지고 돌만 남았습니다.
얼굴 바로 뒤로 뚫린 구멍이 보이시죠?
송나라 때 불상을 보호하기 위해 아홉 칸의 목조건물을 세웠다 합니다.
이런 형태는 이미 우리가 원강석굴에서 보았기에 전혀 이상한 형태가 아니지요.
앙코르 유적 중 바이욘 사원의 석불은 당시 그곳의 왕이었던 자야바르만 7세의
얼굴이라고 하며 앙코르 왓에 가면 수리야바르만은 자기가 비슈누의 환생인지 알고
꿈속에서 살았다고도 하고요.
이렇게 좋은 시절 나라를 경영하던 왕은 가끔 자기가 신이 아닌가 착각하기도 했고 북위도
불교를 받아들일 때 담요가 다퉁 운강석굴을 만들며 5대 조가 모두 부처라고 했다잖아요.
요즈음 만약 그런 생각을 한다면 감금당한 상태에서 병원의
집중 치료가 필요한 경우겠지요?
처음 만들었을 때는 석벽 위에 구멍을 파고 횡목을 끼운 후 지붕을 만들어 덮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 이유는 대불 위를 보면 일정하게 구멍이 파진 것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도 보이시죠?
그곳에 기둥을 끼운 후 앞으로 횡목을 올린 후 그 아래로 기둥을 설치하고
위로는 지붕을 만들었던 모양입니다.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느냐고요?
왜 그러세요.
이제 佳人도 제법 득도의 길로 접어든 것으로 생각합니다.
지금은 관람객의 편의를 위해 계단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오래전에 찍었던 사진을 보면 정리가 되지 않은 어수선한 모습입니다.
마치 폭격이라도 맞은 듯 말입니다.
신중국이 들어서며 제법 깔끔하게 보수 보완했나 보네요.
그러나 막 신중국으로 들어서는 그 시기에 문화혁명을 거치며 이곳 석불은 무자비하게
도륙당해 얼굴 없는 부처가 부지기수로 많은 것을 우리는 이미 보고 왔잖아요.
아무리 아름다우면 무엇합니까?
안타까운 일이지만, 양쪽 팔이 잘렸습니다.
한번 잘린 팔은 전설의 고향인 중국에서조차 재생되지 않습니다.
여기도 광풍이 불며 지나갔단 말입니까?
봉선사의 거대한 불상 군은 꼭 둘러보아야 할 곳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이곳 용문석굴 중 가장 후기에 속한 시기에 만들어졌기에
그 섬세함과 아름다운 예술성이 뛰어났기 때문일 겁니다.
사실 이곳만 돌아보아도 용문석굴을 보았다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용문석굴의 하이라이트 부분인 셈입니다.
봉선사는 평지에 있지 않고 계단을 한참 걸어서 올라가야 합니다.
조금 끙끙거리며 올라가야 멋진 모습을 보여주겠다니까 힘들여 올라갑니다.
폭이 35m나 되는 넓은 실내에 대불의 높이가 무려 17.14m에 이릅니다.
이 대불을 노사나불(盧舍那佛)이라고 한답니다.
역시 고생하며 올라온 보람이 있습니다.
세상은 이런 것 하나도 만만한 게 없습니다.
노사나불이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열심히 수행하신 공덕으로 나타나신 부처님으로
복과 덕이 가득하게 이 세상의 불쌍한 모든 사람을 구제하시는 부처님이라고 하네요.
삼신불의 하나이신 보신불이라고도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오랜 세월 동안 수행으로 말미암아 무궁무진한 공덕을 쌓아야만 가능한 일이라 하네요.
佳人 같은 사람은 죽었다 깨나도 이를 수 없는 경지임이 분명합니다.
세상에 공짜 점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깨달음이란 쉽고 편하게 얻어지는 게 아니잖아요.
뭐 요즈음 어리석은 중생인 佳人보다도 더 못한 수도자도 있기는 하더군요.
빠떼루는 중생만 받는 게 아닌가 봐요.
귀의 길이만도 1.9m라면 농구 선수 정도의 키를 가진 사람과 같은 크기입니다.
얼굴의 크기가 4m로 볼이 통통하며 눈썹은 그믐달 모양입니다.
눈은 아래로 향해 있으며 굳게 다문 입은 단정하면서도 우아합니다.
얼굴 전체에서 풍기는 인상은 인자하면서도 위엄이 넘친다는 느낌입니다.
이런 모습만 보면 절대로 무측천이 아니라는 확신이 섭니다.
그러나 반대로 다시 자세히 보면 확실히 여자로 보입니다.
잔잔한 미소로는 모나리자를 으뜸으로 친다고 하지만,
노사나불의 미소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잠시 서서 바라보면 그 미소에 압도되어 세상의 근심, 걱정 모두 놓아버릴 것 같습니다.
그냥 바라만 봐도 좋습니다.
오욕도 칠정도 모두 멀리할 것 같습니다.
佳人에 그동안 얼마나 기다렸는데 왜 이제야 왔느냐고 하는 듯합니다.
아무래도 불상 조성 후기인 675년에 완성한 것이기에 앞에 만든 좋은 것을 모두
곁눈질하며 집대성했기에 수려한 용모에 아름다운 자태며 온화하고 인자한 미소가
압권이며 자세도 위풍당당한 자세입니다.
누구는 중국의 비너스라고 하던가요? 나 원 참!!!
앉아있는 비너스도 처음입니다.
여성스럽다는 이 말은 그래서 이 불상의 모델이 뒷돈을 댄 측천무후라는 설이
있는데 혹시 위의 사진에 보이는 게 측천무후의 실제 모습이 아닐까요?
평소에 한 짓을 보면 다음 세상에서는 당연히 이렇게 하고 지낼지 모릅니다.
이 이야기는 아니면 말고의 전형입니다.
심증은 가나 물증이 없다면 말입니다.
봉선사의 석불 모습은 다른 말로 조정을 의미한다 합니다.
가운데 노사나불은 황제를 의미하고 두 보살은 비빈을, 그리고 두 제자는 문신을,
천왕과 역사는 무신을 의미한다 합니다.
말도 이렇게 잘 꾸며 냅니다.
이게 무슨 당나라 황실의 조직 도표입니까?
주불은 아까도 이야기한 측천무후라고도 한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봉선사를 만들 때 천문에 밝은 사람을 보냈고 지분전(脂粉錢) 2만 관을
보내 지원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답니다.
그러고 보니 여자의 얼굴로도 보입니다.
무측천이 정말 저렇게 인자하고 아름다웠을까요?
그녀가 한 일을 열거하면 절대로 저런 인자한 얼굴이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통통하기는 해도 별로 인자한 자태는 아니라 생각되네요.
평생을 살며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까?
중국 황궁에서는 고양이를 키우지 못하는 원인 제공도 하지 않았습니까?
자기가 낳은 딸의 100일 잔치에 황후를 부른 후, 황후가 돌아간 뒤 자기 손으로 100일 된
딸을 죽인 죄, 그 죄를 황후에게 뒤집어씌우고 고종의 애첩인 소숙비까지 한꺼번에
피와 뼈와 살이 튀기는 곤장 100대에 처하고 팔과 다리를 잘라 술독에 빠뜨려 죽인
죄로부터 시작해 그녀의 악행은 이루 열거하기도 어렵잖아요.
마지막 가는 길에 자신의 비석에 글자를 남기지 말라고 하며 갔다고 합니다.
비석에 글자를 남기지 않은 무자비(無字碑)는 중국에서도 몇 개는 유명하기는 하다는군요.
살아생전 워낙 한 일이 많아 작은 비석에 글을 남긴다는 게 웃긴다고 남기지 않은
오만방자형이 있고 온갖 나쁜 일을 골라가며 했기에 사후에 누군가 비석마저 깨버릴까
두려워 글을 남기지 않은 새가슴형, 그리고 자신이 한 일에 자기 세대에 글을
남긴다는 게 웃긴다고 후세 사람이 마음대로 해석하라고 글을 남기지 않은
백지위임형으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비석입니다.
과연 무측천은 무슨 생각으로 자신의 비석에 글을 남기지 말라는 그런 짓을 했을까요?
여러분은 어느 부류에 속한 여자라 생각하세요?
아참!
글자를 모르는 문맹자이기에 글을 남기지 않았을 수도 있겠군요?
이 대불은 중국 당나라 시기의 불교조각의 예술적 걸작이라 할 수 있답니다.
정관의 치라고 중국 역사상 가장 번성했던 나라 중 하나이며 이 불상을 만들 시기도
대단히 융성했던 시기이기에 아마도 조각 예술의 백미를 보여주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하늘은 우리에게 욕심을 버리라 합니다.
탐욕도 내려놓으라 합니다.
그러나 이곳에 석굴을 파고 부처를 만들었던 사람은 모두 욕심으로 만들었습니다.
부처는 우리에게 물처럼 살아가라 합니다.
구름처럼 살아가라 합니다.
그러나 이곳에 석굴을 파고 부처를 만들었던 사람은 과연 모두 탐욕도 버리고 살았을까요?
왜 아무 힘도 없는 민초만 가지고 그렇게 살라고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