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에서 시작한 절벽장랑(絶璧長廊)
드디어 1971년 가을,
지금으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41년 전 어느 가을날이었습니다.
그해 가을은 유난히 단풍이 곱게 물들었던 해였지요.
제일 먼저 마을 서기였던 선밍신(申明信)의 제의로 앞집에 사는 개똥이 뒷집의 덜수 등이 밧줄을 사용해
제일 먼저 절벽의 높이와 거리를 재며 공사내용을 그림으로 그려 관청의 전문가에게 터널 공사에 관한
자문을 구하게 됩니다.
드디어 우공이산의 대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궈량촌 사람들은 기계의 힘이 아니라 옛날부터 중국사람이 했던 순수 사람의 힘만으로
절벽에 굴을 뚫어 길을 내겠다는 말입니다.
마을 사람 모두가 하나가 되어 굴 뚫기에 너도나도 나서기 시작합니다.
집안의 부지깽이까지 말입니다.
덜순이, 덜숙이, 밍월이, 삼숙이까지 나섰을 겁니다.
덜순이는 그동안 산양을 키워 판 돈을 덜숙이는 온 산을 헤매며 약초 등을 캐다 내다 팔아서 공사에 사용될
망치나 정 등 돌 깨는 장비를 사들였고 전기도 없고 기계도 없는 최악의 조건이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13명의 동굴 파기 돌격대를 조직했답니다.
허리에 밧줄을 감고 절벽에 매달려 정으로 돌을 깨며 붉은 홍암 절벽 곳곳에 지금 우리 눈에 보이
는 천창(天窓)이라고 부르는 구멍부터 먼저 만들었습니다.
천창(天窓)은 그 용도가 컴컴한 동굴을 밝게 해 줄 뿐 아니라 그 안에 동굴을 팔 때 나오는 돌무더기를
운반하여 버릴 수 없어 절벽 아래로 던져버리기 위함입니다.
우리 귀에는 의심 가는 점이 많지만, 이 부분에 관하여는 佳人은 믿기로 합니다.
왜?
중국이라는 나라는 기자재에 의존하기보다 맨몸으로 때운다는 것이 더 맞는 말이니까요.
지금도 황하가 범람하면 중국은 주민과 군인이 동원되어 맨몸으로 흙을 나르고 둑을 쌓는 모습을 TV를 통해
볼 수 있잖아요.
중국이 미련하다 하지만, 그래도 믿는 구석은 사람의 힘입니다.
중국이 지금 세상을 향해 큰소리치며 버티는 힘이 바로 인구 때문이 아닌가요?
13명의 궈량 마을 청년들은 천지에 모여 그곳부터 아래로 내려갈 수 있는 절벽에 굴을 뚫어
길을 내겠다고 다짐하고 1972년 3월 9일 처음으로 굴 뚫기에 들어가게 됩니다.
드디어 이곳에도 한국의 새마을 운동이 시작된 것이지요.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 길도 넓히고~"
우리 새마을과 다른 점은 초가집이 아니고 돌로 쌓은 집이고 마을 길도 넓이는 게 아니라
아예 없던 절벽을 뚫어 길을 새로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궈량 마을은 해발 고도가 높고, 농사지을 땅도 변변치 못합니다.
사진에 보시듯이 집을 돌로 지었다는 말은 이 동네가 돌밭이라는 말이잖아요.
또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서리 없는 날도 아랫마을인 평지에 비해 무척 짧았습니다.
1년에 단 한 번 농작물을 씨를 뿌려 살아가는 가난한 깡촌인 곳입니다.
정말 똥꼬가 찢어질 정도로 가난한 마을입니다.
얼마나 먹는 게 조악했으면 소화도 제대로 되지 않아 세상 밖으로 나오다 거기가 찢어지겠어요. 그쵸?
죽어서도 흙에 묻히지 못하고 돌로 만든 관에 들어가야 하는 곳이 바로 이 마을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13명의 마을 청년은 하루에 겨우 허기만 면할 적은 식량으로 모두가 버텨야 했답니다.
강냉이로 만든 그런 열악한 음식이 하루 세끼의 전부였다고 하네요.
매일 한 사람에게 배당한 옥수수가 두 근밖에 되지 않았다고도 하고요.
요즈음 우리 주변에 다이어트하려는 사람에게 이렇게 먹이고 여기에 와 정으로 돌을 깨며 굴 파는 일을
하라고 하면 한 달도 되지 않아 배에 식스팩이라는 초콜릿 복근이 만들어질 겁니다.
시작이 반이라고 어느덧...
1975년 말, 공사 시작 4년이 되며 공사는 가장 어려운 단계로 접어들었다네요.
마을 사람들에겐 더는 내다 팔 산양도 약초도 없었습니다.
겨우 연명할 식량도 거의 떨어졌습니다.
이 지경에 이르면 지금 우리가 무슨 일을 하고 있나 회의감만 드는 시기입니다.
처음에는 의욕으로 덤볐지만, 난관에 부딪히면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잖아요.
어느 곳을 찾아봐도 이 마을에서는 동전 한 닢 나올 곳이 없었습니다.
지금이야 이렇게 산에서 약초를 캐기만 하면 관광객이 몰려들기에 좋은 값을 받고 팔 수 있지만...
사람이 마지막 어려운 지경에 이르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팔을 걷고 나서게 되잖아요.
새벽 5시에 일어나 주민 모두는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라는 노래를 부르며 5km의 산길을
오르내리며 두더지처럼 구멍을 파고 또 팠습니다.
덜순이도 삼숙이도 "잘살아 보세~ 잘살아 보세~ 우리도 한 번 잘 살아 보세~"라고 부르며 따랐습니다.
그런데 정말 잘 사는 게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말입니다.
나중에 보니 중국 정부가 甲이었네요.
궈량촌 절벽의 평균 높이는 약 105m로 절벽 중간에서 석창을 내는 작업을 하려면 정상에서 절벽을 타고
내려올 밧줄이 필요했지만 이를 살 돈마저 없었습니다.
달리 방법이 없자 집집이 염소의 고삐를 풀어와 하나하나 이어서 밧줄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정말 사실 같은 이야기지요?
그게 허술해 위험하지 않았을까요?
만약 떨어져 죽는다면?
중국에서는 팔자소관이라고 했겠지요.
공사 인부로 나선 청년들은 목숨을 건 열정으로 지금은 절벽을 자동차도 다닐 길로 바꿔 놓았습니다.
궈량촌 사람들은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5년 동안 거대한 절벽에서 손으로만 어마어마한 양의 돌덩어리를
캐내어 절벽 아래로 던졌고, 정 12톤이 닳아 없어져 버렸고, 8파운드짜리 쇠추 4.000여 개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정말 억척같은 사람들입니다.
이게 바로 인간승리가 아니겠습니까?
우공이산이 별 겁니까?
70세의 덜수 노인부터 10대의 덜순 처자까지 공사에 참여해 하다못해 돌조각을 실어 나를 정도였다고 하네요.
커다란 돌덩어리는 손으로 들어서 옮기고, 작은 것은 광주리나 바구니에 담아 어깨나 머리에 걸쳐 운반했습니다.
손가락마다 피가 터지기 일쑤였고 상처가 아물 날이 없었습니다.
일회용 밴드는 이럴 때 필요한 것이지요.
모두 굴을 파는 일에 동원되면 그럼 그 사이 소는 누가 키웠을까요?
확인해 보니 소는 키울 일이 없다고 하네요.
이 동네는 소를 키우지 않고 주로 몸집이 작은 염소나 양만 키웠다 합니다.
왜 소를 키우지 않았냐고 묻고 따진다면,
옛날에 사람도 올라가기 어려운 절벽 위로 사다리를 타고 왜 무거운 소를 끌고 올라가느냐고 화를 냈을 겁니다.
"네가 해라!"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여기는 젖소 부인도 없었을 것이지만, 염소 부인은 있었을 겁니다.
마침내 공사 시작 5년 하고 두 달이 지난 1977년 5월 1일 절벽장랑(絶壁長廊)이라 불리는 궈량 터널은
왕후이당 등 몇 사람의 희생자들을 내고 드디어 개통되었답니다.
죽은 사람만 억울하게 되었네요.
이렇게 궈량촌 마을 주민의 희생 위에 만들어진 절벽장랑을 왜 중국 정부에서 돈을 받습니까?
왜 지들이 갑이라고 난리 합니까?
마을 주민이 받아야지요.
그래서 우리 부부는 마을 주민인 안내양에게 돈을 주고 버스에 자빠져 들어왔습니다.
궈량동은 절벽을 전부 1.25km나 뚫어나가면서 높이 5m, 폭 4m로 만든 터널입니다.
태항산 동쪽에 만든 인공천하(人工天河) 홍치쥐(紅旗渠)와 함께 현대판 우공이산을 현실화시킨 일로
절벽장랑은 가난한 민초들이 손으로만 일궈낸 기적으로 승화했습니다.
이곳에서 파낸 돌은 바로 천창이라고 부르는 구멍을 통해 밖으로 던졌다 합니다.
궈량 터널에는 절벽 쪽으로 천창이라 부르는 크고 작은 구멍이 모두 35개가 나 있습니다.
이곳을 걷는 관광객은 그 모습을 사진에 담느라 바쁩니다.
이 구멍은 천창(天窓)이라 불리는 통풍구이고 채광창이자 지금은 전망대의 역할을 합니다.
또 공사 중에는 굴에서 캐낸 돌을 밖으로 내놓는 배출구 역할까지 했습니다.
세상에 인간의 고통으로 이룬 이런 곳이 지금은 작품사진으로 찍기 위해 많은 작가가 모여듭니다.
예술이란 이렇게 민초의 피와 눈물과 땀과...
그리고 마지막에는 목숨을 때로는 요구하나 봅니다.
관경대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붉은 색깔의 바위는 마치 붉은 장미꽃이 부끄러워할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운 저녁노을이 비출라치면 이곳은 마치 붉은 장미의 향연처럼 보일 겁니다.
가을의 단풍까지 더해진다면, 여기는 붉게 타오르는 붉은 절벽이 될 겁니다.
그 사이로 사람과 자동차가 꼬리를 물고 지나가는 모습 또한 기이한 모습입니다.
마치 개미굴에서 개미가 꼬리를 물고 꼬물꼬물 이동하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곳에는 모두 35개의 천창(天窓)이라 부르는 석창이 열려 있습니다.
하늘을 담고 싶어 천창이라고 불렀을까요?
모양도 규격도 하나도 같은 게 없이 일정하지 않게 만들었네요.
햇빛도 받고 싶고 공사하며 파낸 돌을 버리기 위해 만들었다 합니다.
그 절벽의 높이는 300여 m에 이르고 두께가 500여 m이며 길이가 무려 6.000여 m에 이른다 합니다.
여기 궈량촌의 절벽장랑은 마을 주민의 눈물과 피와 땀과 목숨마저 바친 인간승리의 현장입니다.
여기에 서서 바라보면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가 느낄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보고 게시는 사진은 인간승리의 현장이며 인간의 위대함을 보고 계십니다.
절벽 아래는 25억 년 전인 신태고대에 형성된 화강 녹암으로 이루어졌고
그 위의 절벽은 12억 년 전에 형성된 석영 사암이라 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모습은 6천5백만 년 전에 만들어져 지금에 이르렀다고 하네요.
그런 세월은 우리 같은 사람에게 얼마나 긴 시간인지 느껴지지 않습니다.
느낄 이유조차 없습니다.
이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돌을 하나 보여 드릴까요?
걸어 다니다 보면 자주 눈에 보입니다.
위의 사진에 보이는 돌이 무엇으로 보이십니까?
佳人 눈에는 옛날 어린 시절 맛나게 먹었던 기억 속의 국화빵을 만드는 국화빵 틀로 보입니다.
요게 바로 지질학적으로 연대를 측정할 수 있는 스트로마톨라이트라는 화석 구조라고 하네요.
그러니 5억 년 전에 살았다는 녹조류(錄藻類) 활동에 위해 생긴 박편상 석회암이라 합니다.
전쟁이 무서워...
하나 둘 모여들며 살아온 궈량촌 사람들.
그런 이곳도 돌 틈 사이를 들춰보니 아픈 이야기였던 전쟁 이야기가 들립니다.
그런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 숨어 숨을 죽이며 살았을 겁니다.
아이가 우는 소리마저 문밖으로 나가게 하지 않으려고 입을 막으며 지냈을 겁니다.
이 마을을 지나는 바람마저 숨어 지나며 소리마저 내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 마을을 걷다 보면 돌 틈 사이로, 지나가는 바람결에도 그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여행이란 이렇게 돌 틈도 들춰보고 나뭇잎도 들춰보며 다니는 겁니다.
많은 사람과 함께 떠나는 여행도 편하고 좋지만, 사실 가이드 소리만 들으려 합니다.
이렇게 부부 둘이서 천천히 다니다 보면 소리 죽여 지나가는 바람도 볼 수 있고
소곤거리는 마을 사람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답니다.
왜?
혼자 돌아다니는 자유여행이니까~
위의 지도를 보시면 절벽장랑이 만들어지기 전에 마을 사람이 오르내렸던 천제라는 사다리가
있는 곳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제 궈량촌은 세상을 향해 마을 사람은 손짓합니다.
그 손짓의 첫 번째 움직임이 바로 마을로 들어오는 길을 내기 위해 처음 정을 망치로 두드리며
길을 만든 이곳이 아닐까요?
계곡이 갈라지는 곳에 세상을 향한 첫 번째 절벽을 깨며 낸 소리가 바로 위의 사진이 보이는 곳일 겁니다.
바로 이곳이 절벽에 기다란 회랑이라는 터널을 파기 시작했던 곳입니다.
그 이름을 절벽장랑(絶璧長廊)이라 부르며 시작점이 바로 이곳입니다.
지금까지는 지나가는 구름에도 보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살랑거리는 봄바람에도 말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숨을 죽이며 웃고 울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 처음 돌을 깨며 낸 첫소리는 세상 사람에게 마을의 존재를 알린 위대한 소리였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우리 부부도 찾아왔나 봅니다.
위의 사진은 저녁에 어두워질 때 찍은 사진이라 흔들렸습니다.
호주에서 온 여행객을 산책 중 만났습니다.
콴타스 항공이 파업중이라는 뉴스를 본 시점이라 어찌 왔느냐고 물어보니 다른 항공사의 비행기를
타고 왔다고 합니다.
보세요.
이제 전 세계에서 숨어 지낸 마을 궈량촌을 찾아 이렇게 모여들잖아요.
그리고 그 위에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름인 천지(天池)라는 못이 있습니다.
이 천지에서 물이 폭포를 이루며 거대한 암벽을 두 개로 나누어버렸습니다.
이 작은 천지라는 연못은 욕심도 많게 하늘을 모두 담고 싶었나 봅니다.
천지의 수면에 비친 하늘은 평화롭고 잔잔합니다.
세상을 향해 포효하듯 천지의 물이 떨어지며 이제 세상과 교통 하려 합니다.
이제 우리 같은 관광객도 이 마을을 구경하러 가야 하지 않을까요?
내일도 여러분이 함께 하시면, 그 인간승리의 현장인 절벽장랑을 佳人의 두 발로 걸어서 내려가며
하늘을 향해 열린 天窓을 하나씩 사진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어디 숨어 우는 것이 바람뿐이었겠습니까?
이런 외진 곳에 숨어 지낸 사람 또한 숨어 흐느끼며 살지 않았겠습니까?
인간의 삶이란 참 모질며 위대한 것 같습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에 숨어들어 지낸 지 어언 수백 수천 년..
그동안 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지만, 이제는 세상을 향하여 손짓하며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