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여행기/베이징(北京)

촨디시아춴(爨底下村 : 찬저하촌)은 옛 이야기 지즐대는...

佳人 2011. 12. 27. 08:00

이 마을은 바깥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지도 못하는 가 봅니다.

베이징에서 올림픽이 열렸고 천지가 개벽했는지도 알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아마도 지금 중국을 다스리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마오쩌둥이라고 대답할 겁니다.

 

세상이 변했음을 알지 못하기에 옛날 신중국이 출범할 때의 구호가 아직도 담벼락에 남아

있는데 어찌 보면 정말 속 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인지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혁명이니 모 주석 만세를 외치고 있나 봅니다.

무슨 해방입니까?

언제까지 혁명만 외치고 해방만 소리치며 살 겁니까?

혁명과 해방만 외치다 문명국이라는 중국이 그렇게 노회 한 곰탱이가 된 게 아닌가요?

 

혁명을 위해 자기 집의 담벼락을 내어 주고...

붉은 글씨로 혁명 구호를 쓰고...

세상이 변했지만, 이곳은 아직도 혁명 중인 곳인가 봅니다.

 

인간이기에 이런 규범은 지구가 멸망하기 전까지 유지될 것입니다.

따라서 촌민은 일정한 문화적 소질과 보국헌신(报国献身)의 정신이 대대로 이어져 왔으며,

한씨 자제가 중일갑오해전(中日甲午海战)에서 공을 세웠던 소식은 지금까지 촌락 내에서

미담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는군요.  

 

따라서 촌민들에게는 국가에 대한 열정적이면서 충실한 애국심을 가지고 있답니다.

원래 오지마을일수록 그런 경향이 강하기는 하지요.

일본이 촌락을 침략했을 당시 촌락에 있는 총 108채의 집에 살던 주민 중 70여 명의

청년들이 참전하였으며, 참전 인원 중 34명은 전쟁 중 순국했다고 하네요.

일본이라는 나라는 참말로 여러 곳에 다니며 아픈 상처를 주고 있네요.

그래서 요즈음 그런 고통을 받나요?

 

나머지 30여 명도 여러 전투에 참전함으로써 애가, 애국의 민족정신을 보여주었다고 자랑하는

마을로 요즈음 젊은 사람에게는 고리타분한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나 나라는 민초에게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지만, 민초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초개로 여기며 싸웠습니다.

 

해방 후에는 펑사셴(丰沙线, 봉사선) 철도와 109번 국도가 멀리 개통되며 이 마을도 변화를 겪게

되며 먼저 만들었던 도로인 촨디시아춴 구이다오가 가지고 있던 중요도가 사라지면서

상품 교역의 중심지에서 변방으로 밀려나게 되지요.

그때부터 이 마을은 농업 생산이 주가 되는 소규모 산촌으로 변해버렸습니다.

한마디로 개털 마을이 되었다는 말이지요.

 

이 의미는 지방도로 가에서 휴게소와 주유소를 잘하고 있었는데 도로 정비계획으로

다른 마을로 큰 도로가 나버렸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개털이 아니라 족제비 털도 되지 못하잖아요.

온종일 기다려도 자동차 한 대 지나가지 않는데 환장하지 않겠어요?

 

촨디시아춴은 여러 왕조의 발전 과정을 거치면서 촌락 내에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각 시대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이는 역사의 유물로 빛을 발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오히려 이렇게 버려진 곳이 지금에 와서는 전혀 발전하지 못해 더 주목을 받는 겁니다.

세상은 이렇게 음지가 양지되고, 양지가 음지가 되는 일이 순환적으로 일어나나 봅니다. 

 

쥐구멍에도 볕 든다 했나요?

바로 이 마을의 요즈음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촌구석은 깡촌의 모습을 지녀야 오히려 촌으로 주목을 받잖아요.

20세기 80년대 들어 산촌 경제가 곤궁해짐에 따라 여기도 다른 곳처럼 많은 젊은이가

도시로 나가 지식을 배우고 정착하게 되며 마을은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답니다.

 

이게 바로 중국 정부가 제일 먼저 고민하고 있는 농민공 문제가 아니겠어요?

이미 1억 명이 도시로 나갔고 대기 예비 농민공이 2억 명이나 된다는군요.

앞으로 큰 사회문제가 바로 도시로 진출하는 농민공의 문제일 겁니다. 

따라서 지금은 마을의 규모가 작아져 주민도 얼마 남지 않아 이전의 번화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말았고 지금 도시로 나간 농민공은 하루 품삯으로 50원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이

부지기수라 합니다.

 

또한, 경제가 쇠퇴함에 따라 촌민들은 마을의 재개발을 막을 힘이 없었고,

이에 따라 이전의 풍채와 전원 환경 역시 사라지고 말았다 합니다.

그나마 고대 촌락이 가지고 있는 역사 문물로서의 진귀한 가치를 인정받아 일부는 보존된

상태지만, 이들은 이미 베이징 서부에서 문물 보호 가치와 관광 개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관광자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곳이 바로 묵은 장맛이 나는 그런 곳일 겝니다.

 

마을은 동서로 뻗은 꼬불꼬불한 돌길을 따라 사면이 모두 막힌 전형적인 사합원 양식의 집이

70여 채 정도 있는 마을입니다.

그 모양이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부챗살처럼 퍼져 있네요.

이 건물들은 대부분 안채와 안채 건너편의 건물, 그리고 양쪽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고

일부는 별도로 부엌을 따로 두기도 했답니다.

 

건물들 주변에는 문의 안팎에 세운 영벽(影壁)과 문루, 말고삐를 매는 기둥 전마장(拴馬桩),

말을 오르고 내릴 때 이용하는 돌로 만든 상마석(上馬石)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집집이 문틀 모양이 다릅니다.

문의 색깔과 문에 박힌 못의 숫자, 그리고 문 앞의 계단 수를 보면 그 집주인의 지위를

알 수 있다고 하니 참말로 별난 동네이네요.

 

이런 시골에 살며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구분입니다.

함께 하하 호호하며 살아가면 되지 문짝에 밖은 못의 숫자와 계단으로 인간만이 지위를

구분한다니 세상에 이런 짓을 하며 살아가는 동물은 인간뿐일 겁니다.

키 높은 문루의 양쪽 벽에는 화려한 벽화를 그리고 건물의 기둥과 대들보, 심지어 전마장에도

정교한 조각을 새겨 넣었습니다.

 

위의 사진은 이 마을에서 가장 직급이 높은 사합원은 청나라 초기에 지은 광량원(廣亮院)이라는

집인데 남북으로 두 겹의 뜰을 가진 광량원은 동쪽 채와 서쪽 채 그리고 중앙 채 등 따로 떨어진

사합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안으로 천천히 들어가 봅니다.

그리니 각각의 사합원이 커다란 또 하나의 사합원을 이루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 뒤에 있다는 사합원으로 가기 위해서는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만한 좁은 골목길로 갑니다.

이런 형태로 만든 이유는 전쟁에 대비한 보루의 형태라고 보입니다.

 

이 집은 방수만 모두 45칸이고 문은 만사형통을 의미하는 여의 문(如意門)이며 문 앞에

7개의 계단이 있고 입구의 바닥에는 순조로운 벼슬길을 바라는 청석과 좋은 운을 뜻하는

차돌이 깔렸는데 이렇게 꾸몄다고 모두 벼슬길에 오른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마을 앞에는 남파량(南坡梁)이라는 빼어난 산등성이가 예쁘게 두러 누워 있습니다.   

돌을 깐 산길을 콧노래라도 부르고 잠시 오르면 마을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멋진 풍광이

우리를 기다리며 마을을 내려다보면 하늘을 우러러보는 거북이 모양과 복을 가져다주는

박쥐 모양도 볼 수 있습니다.

아! 이미 우리는 모두 보았으니 올라갈 이유가 없군요?

그래도 나중에 올라보렵니다.

 

광량원을 나와 조금 더 걸어가면 오도묘라는 사당이 있습니다.

오도 할아버지를 모신 사당으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로 모신다 하네요.

세상에 인형으로 만든 진흙에 옷을 입혀 놓았다고 저 인형이 인간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영화로는 처키 인형처럼 무서운 것은 보았지만...

인간이 참말로 나약한가 봅니다.

흙으로 빚은 인형에게도 기대고 살아가니까 말입니다.

 

그 아래로 내려가면 커다란 방아가 있습니다.

아마도 마을 잔치를 벌일 때 곡식을 빻으려고 만든 게 아닐까요?

이 마을은 중국인에게 재물신으로 통하는 관우를 모신 관공묘(關公廟)와 자식을 소망할 때 찾는

낭낭묘(娘娘廟), 그리고 천하태평을 지켜준다는 관음묘 등이 있습니다.

관우는 바쁘군요?

이 골짜기까지 따라와 많은 사람에게 재물을 내려주어야 하니 말입니다.

1715년에 지은 관제묘는 이 마을에서 가장 레벨이 높은 곳으로 기우제도 지내고

등불놀이도 하는 곳이라는군요.

 

이 마을에 특별한 것은 집을 지을 때 사합원 문의 오른쪽에는 문신을 공양하는 불단을 만들었다

하고 그 주변에 다양한 무늬를 그려 예쁘게 치장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마을에만 있는 사희(社戱)라고 하는 연극이 있답니다.

이 연극은 역사가 400년이나 되며 세계무형문화재에 등록이 되어 있다는군요.

 

어때요?

이런 마을을 걷다 보면 마치 우리의 고향처럼 향수라는 노래가 저절로 흥얼거려지지 않나요?

환장하게 아름다운 우리의 노래, 향수의 아름다운 가사가 생각나는 노래 말입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음음음음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 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네~ 이런 곳을 산책할 때는 이런 노래라도 흥겹게 웅얼거리며 걷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佳人이 비록 노래는 못하지만, 입속으로 웅얼거리기는 하거든요.

아니라고요?

이곳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노래라고요?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여행하다 보면 가끔 우리를 빙그레 미소 짓게 하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마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주 오래된 고성은 우리와는 현실감에서 동떨어지지만,

이런 옛 마을은 우리 기억에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여행이란 유적 같은 곳도 마음에 들지만,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떠오르는 친근한 이런 곳도 좋습니다.

우리를 50년 전으로 되돌려 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