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이 유적을 발굴한 사람은 도굴꾼이었습니까?
세상 사람에게 널리 알려진 트로이라는 유적 치고는 너무 허술해 보입니다.
이야기로만 전해 내려온 전설이 한 사람의 집념으로 세상에 역사로 증명되었습니다.
호메로스의 이야기 속에 트로이는 지금은 그냥 돌무덤만 있습니다.
그러나 상당수의 역사학자는 트로이 전쟁이 빼앗긴 왕비 헬레네 탓에 일어난 전쟁이 아니라,
그리스의 도시국가가 연합하여 지중해 상업무역권을 트로이로부터 빼앗기 위한 전쟁이라고
주장하는데 어쩌면 이 말이 더 설득력이 있는 말일지 모릅니다.
호메로스는 더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려고 불륜을 가미하고 신들도 동원하여
섞어찌개를 만들었다가 정답이 아닐까요?
불륜을 저지르고 가출한 스파르타의 헬레네라는 여자 하나 때문에 그리스의 모든 나라가
연합을 하고 같이 전투에 참전하고 10년이나 싸웠다는 게 이해가 가십니까?
에게 해를 접한 아늑한 만과 야트막한 구릉지 위에 형성된 도시국가 트로이는
기원전 3.000년 전부터 사람들이 산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합니다.
트로이의 현재 지명은 히사를륵으로 '성이 있는 곳'이란 뜻이라 합니다.
그만큼 이 지방은 사람이 모여 살기에는 아주 좋은 지역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유물 발굴 도중에 발견된 오래전에 죽은 사람의 유골입니다.
웅크린 자세에서 죽어가며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죽은 자는 말을 하지 못하지만, 그 자세나 주변에 남긴 것으로 당시의 상황을 설명한다 했습니다.
그래! 죽은 자여~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게요?
전에는 트로이의 위치를 두고 논쟁이 많았으나 지금 히사를륵이 고대 트로이이라는데
이견을 제시하는 이는 없다고 합니다.
그때의 유물까지 발견되었는데 누가 이견을 제시하겠습니까?
유적지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일리오스(ILIOS)와 윌루사(WILUSA)라는 간판이 붙어 있습니다.
일리오스는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묘사된 지금의 트로이아이며 윌루사는 기원전 13세기의
히타이트 문서에 나오는 고대도시인데 고고학회에서는 두 곳을 같은 곳으로 보고 있기에
입구에 함께 적었습니다.
슐리만의 발굴 목적은 트로이 왕인 프리아모스의 보물을 찾는 것이 주목적이었으며
출토된 유물을 무단으로 밀반출하여 자기 부인인 소피아 슐리만에게 마치 프리아모스의
왕비인 양 치장을 시킨 사진이 이곳에 있습니다.
두 번째 결혼에서 슐리만은 마흔 일곱의 나이에 열일곱 살의 어린 색시를 얻었으니..
지금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당시에는 유물을 발굴하면 자연스럽게
가져가는 게 상식이었던지 유물을 목에 걸고 귀에 걸면 모두 왕비가 되겠습니까?
오히려 도굴하여 건다면 죽은 자의 영혼이 함께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일로 죽은 자의 영혼이 화가 나 슐리만의 마지막이 비참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땅속에 묻힌 유물을 파내는 일을 하는 도굴꾼과 고고학자의 차이점은 어떤 게 있을까요?
개인의 이득을 위해 그 일을 하느냐 아니면 인류를 위한 일을 하느냐의 차이가 아닐까요?
그런데 슐리만의 행동을 보면 자신만을 위해 토로이아의 유적을 파헤친 느낌입니다.
그러면 슐리만은 고고학자가 아니고 허가 난 도굴꾼이었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는 트로이아에 유적을 발굴한 일이 어쩌면 고대 유물 발굴을 위한 위대한 작업이
아니고 합법적인 도굴꾼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는 그가 발굴한 유물을 1881년 베를린 박물관에 전시하여 세상에서 처음으로
트로이 유적을 널리 알렸지만, 1954년 베를린을 점령한 러시아에 의해 이 유물은
탈취되어 지금은 러시아 푸시킨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합니다.
정말 어느 놈이 진짜 도둑놈인지 모르는 세상입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닌 모양입니다.
세상의 문명국이었다는 나라는 하나같이 모두 파렴치한 일만 한 나라입니다.
지금은 터키 정부까지 가세해 서로 자기 것이라 주장하니 점점 더 복잡하게 얽혀가고
있고 엄밀하게 보면 터키도 이 유적의 주인은 아니지 싶습니다.
오스만 제국과 슐리만 간에 협정은 발굴 유적을 공평하게 반반씩 나누는 것으로
하였지만, 슐리만은 제멋대로 가지고 갔기에 벌금도 물렸지만,
벌금이란 그냥 밀반출한 유물에 비하면 새 발의 피겠지요?
그러면 슐리만이라는 고고학자는 고고학자가 아니라 합법적인 도굴꾼이 아니겠습니까?
도굴꾼과 고고학자의 구분은 어디에 두는 것입니까?
처음 허가 조건은 발굴한 유물은 반반으로 나누고 파헤친 유적은 원상 복구하며
기존의 건물은 건드리지 않고 발굴하며 모든 발굴 비용은 슐리만이 부담한다는
것이었지만, 지켜진 것은 마지막 조항 뿐이었다 하네요.
찬사와 비난을 함께 받으며 살았던 슐리만은 항변할 겁니다.
반반씩 소유하기로 했지만, 성벽의 돌은 대부분 그곳에 두었고 자기가 가지고 간 유물은
보석류 등 반의반도 되지 않는다고..
그래서 지금 이곳에는 맨 돌뿐입니다.
맞습니다.
유물 숫자보다 돌의 숫자가 훨씬 많기에 반반이 아니라
아주 쪼끔만 가지고 간 게 맞습니다.
그래도 맨 돌 뿐이지만 이 돌무덤에다가 어울리지도 않은 나무로 만든 말 비슷한 것을
만들어 놓고 입장료를 받게 했으니 터키 정부는 손해 나는 장사는 아닙니다.
더군다나 이 땅은 터키의 돌궐 족과는 아무 상관도 없으며 역사도 상관없는 곳이잖아요.
허허벌판에 돌 몇 개 보기 위해 세상에서 많은 사람이 몰려오니... 헐~
아마도 고고학상 가장 드라마틱한 발굴을 한 사람이 슐리만이었을 겁니다.
차라리 어색한 목마보다 酒神인 디오니소스의 전차를 끌던 Centaur라는 半人半馬를
만들어 놓는 게 어떨지 모르겠네요.
그게 더 폼 나잖아요.
슐리만이 발굴하기 7년 전부터 영국의 프랭크 칼버트(Frank Calvert, 1828-1908)가
그의 가족 소유인 히사를륵(Hisarlik) 언덕이 옛날 도시국가인 트로이라 믿고 발굴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곳 지형이 옛날에는 바닷가였는데 지금은 바다가 퇴적물에 의해
멀리 밀려 나가 있기에...
결국, 칼버트는 남의 다리만 엄청 긁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함께 발굴하며 트로이 시대 이전의 유물인 청동기시대 유물도 발굴함으로
이 고대 도시가 하나의 도시가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여러 도시국가가 계속
먼저 도시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슐리만은 발굴 당시 제일 아래 있었던 유적은 균열이 심했기에 지진으로 도시가
파괴된 것으로 추정했고, 그 위의 유적에서 많은 금은보화가 발견되었기에
트로이 유적으로 생각했다 합니다.
그러나 지금 밝혀진 것으로는 트로이 1기 유적은 기원전 3.000년부터 2.500년 전에 처음으로
사람이 살았던 유적이며, 트로이 2기는 기원전 2.500년에서 2.300년 전의 유적이라 본답니다.
이렇게 차례대로 지표면에서 가까운 순서로 마지막 유적은 트로이 9기는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시대의 유적으로 당시의 이름이 일리움(ILLIUM)이었다 하네요.
다르다넬스 해협 입구에 있는 일리움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에
로마 사람에 의해 세워진 도시로 4세기경 동로마가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하기 전까지
소아시아에서 가장 번창했지만, 이후 점차 쇠퇴하다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
도시가 되었다고 합니다.
슐리만에 의해 발굴된 이곳은 나중에 1890년대 되르프펠트에 의해 트로이 6기가
트로이 유적이라 정정되었으나 1930년대 블레전에 의해 더 발굴되며 최종적으로 트로이 7기
a층이 기원전 1.250년부터 1.180년 사이에 번성했던 트로이아 유적이라고 밝혀졌다 하네요.
슐리만은 위대한 역사의 발굴자가 아니라 도굴범이었으며 그 유물은 결국, 러시아에서
다시 훔쳐간 왕도둑이었습니다.
세상은 정말 요지경 속입니다.
호메로스의 흉상입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세상에 문명국 대부분은 모두 남의 나라 유물이나 약탈한 문화유적의 범죄국가입니다.
유물이란 원래 있던 곳에 있어야 그 빛을 발하는 법이지요.
재미있는 현상은 사실 그 시대에는 지금의 문명국이라는 나라 대부분이
그런 유물조차 갖지 못한 저개발국이었지요.
그러나 약탈하고 훔친 남의 나라 유물을 자기네 박물관에 버젓이 전시하고 있습니다.
부끄러운지 아셔야죠.
일본처럼 전시도 하지 못하고 몰래 숨겨놓은 나라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