뤄양(洛阳 : 낙양)에서 이런 저런 그런 생각
우공이산에 나온 지명인 하양(河陽)은 강의 북쪽이라는 의미라 하네요.
일반적으로 볕 양(陽)이 들어간 지명은 강의 근처에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제갈량이 살았다는 남양(南陽), 은허의 고장인 안양(安陽), 그리고 이곳 낙양(洛陽)이 모두 강에서 멀지 않은 곳이고
우리나라 서울의 옛 이름이 한양(漢陽)도 한강의 근처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온양, 담양, 밀양 등이 모두 그 이름대로 강이나 하천 근처에 있는 것도 우연한 지명은 아닐 듯하네요.
아무래도 큰 강이 흐르면 그 근처는 당연히 산악지역에서 멀리 떨어지게 되고 산이 가리지 않기에
볕이 잘 들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것도 아니면 말고입니다.
오늘 우리 부부가 가는 곳도 볕 양이 들어가는 이름인 뤄양(洛阳 : 낙양)입니다.
뤄양이라는 도시는 중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이름난 고도라고 알고 있습니다.
뤄양이 이렇게 오랜 세월 도성으로 이용된 이유가 바로 황하라는 큰 강 부근에 자리했기 때문일 겁니다.
역시 큰 강이 근처에 있어야 물 좋은 동네가 되고 물 좋은 곳이라 많은 사람이 모이고 번창하게 되나 봅니다.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갑골문이 나온 곳도 이 부군의 안양 지방이라고 했나요?
그러나 그 대단한 발견도 처음에는 갑골문의 굴욕이라고 할 정도였다고 하네요.
세상에 대단한 발견도 처음부터 대단하게 주목받으며 나오지는 않았겠지요.
그 위대한 발견은 19세기 말엽 안양에서 서북쪽 5리 떨어진 소둔촌이라는 곳에 농부들이 밭을 갈다 보면
늘 뼛조각이 나왔다네요.
물론 청동기나, 옥기나 토기도 나왔겠지요.
처음에는 농사짓는 일에 방해물로 생각되었답니다.
그러나 청동 제품이나 옥기 토기 등은 점차 그 귀함을 알고는 골동품으로 생각하여 팔았지만,
뼛조각인 골편(骨片)은 처리할 방법이 없었답니다.
귀찮기만 한 존재였습니다.
그 뼛조각이 갑골문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당시로는 아무도 없었을 테니까요.
그게 거북이 등짝인지 감자탕의 주 재료인 돼지 잡뼈인지 아니면 개뼈다귀인지 어찌 알았겠어요. 그쵸?
감자탕에 들어가는 돼지 잡뼈는 살점이라도 붙어있지만...
그래서 처음에는 그 뼛조각을 모아 밭 구석에 쌓아놓았다는데 마침 그 부근을 지나던 어느 약재상이 보고
그게 뼈라고 생각하고 뼈라면 틀림없이 몸에 좋을 것으로 생각해 뼛가루로 곱게 빻아 약으로 사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네요.
드디어 그 뼈는 용골(龍骨)이라는 멋진 이름을 붙여 가루로 만들어 신제품으로 한약재료로 팔았다 하네요.
봉이 김선달이 그 동네도 있었나 봐요.
용골이라는 말은 바로 용가리 통뼈라는 말이 아닐까요?
맞아요!
세상에 역사적인 위대한 유산을 갈아 마셨다는 말이 되겠네요.
그러니 용가리 통뼈가 맞나 봐요.
그러면 그 갑골문이 새겨진 뼛가루를 마셨다면 그 사람이 문화유물이 되는 겁니까?
인간문화재 말입니다.
세상에 갑골문이 용가리 통뼈가 되어 한약재로 사용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위대한 갑골문이 새겨진 뼈가 환장하게도 사람 뱃속으로 들어간 셈이 된 겁니다.
이게 무슨 용가리 통뼈도 아니고 약재라니 얼마나 무식한 일이었습니까?
모르면 하늘도 놀랄 이런 일도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요?
처음 발견한 사람은 왕의영(王懿榮)이라는 사람으로 1.899년 청나라 말기 국자감의 제주(祭酒)였던 모양입니다.
그는 마침 그때 학질이라는 고약한 병에 걸려 엄청나게 고생을 하며 온갖 약을 다 썼으나
백약이 무효였다고 하네요.
그러던 어느 날 베이징의 어느 유명한 한의사가 용골이라는 처방을 보내주어 사람을 시켜 용골을 구해오라
하니 가루로 만들지 않은 체 구해온 용골에 예전에 유물 발견 때 많이 보았던 청동기에 쓰인 글자가 보이더랍니다.
왕의영은 먹물깨나 먹었다는 말이겠지요?
지금 사용하는 한자와는 다른 고대 문자였을 겁니다.
이것을 연구해 본 결과 은나라 황실의 점복을 기록한 갑골문이라고 알아냈답니다.
학질은 고칠 생각을 하지 않고 약재로 가져온 글자의 연구에 몰입했군요?
이 외에도 많은 이야기가 전해오지만, 어쨌든 용골이라는 약재로 사람의 뱃속으로 들어가 모두 사라질 위기에서
그나마 역사적인 유물로 밝혀냈으니 대단한 일이라 할 수 있겠네요.
어느 갑골문으로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연대와 묘 주인, 그 신분이 기록된 부호(婦好)라는
이름의 중국 최초의 여장군이었답니다.
그녀의 묘 안에서는 수많은 유물이 그대로 발견되었고 순장자만 16명에 이르고
은나라 왕이었던 무정(武丁)의 배필로 추정한다 하네요.
이런 웃을 수도 없는 일로 인해 갑골문이 세상에 위대한 유물로 나오게 되었다네요.
갑골문이 기가 막혀~
갑골문이 기가 막혀~
갑골문이 기가 막혀~
흥부도 기가 막혀~~
황하의 흐르는 물은 옛날처럼 오늘도 쉼 없이 흐르건만
그래도 물은 예전에 흐르던 그 물이 아니어라...
예전에도 나그네가 이곳에 서서 바라보았겠지만,
오늘도 佳人이라는 나그네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구나.
옛날에 나그네가 바라본 물이 오늘과 같은 누런 물일지언정,
그때 물을 바라보며 했던 생각이 佳人이 오늘 물을 바라보며 하는 생각과 또한 같을 텐가?
인류 문명의 발상지라는 곳에 오니 공연히 여러 가지 생각이 납니다.
그러나 지식의 한계로 답답하기만 하네요.
눈에 보이는 것이 별로 없기에 이런 역사의 도시에 와서도 볼 게 없다고 합니다.
부끄럽고 창피한 이야기지만, 그게 佳人의 한계라 어쩔 도리가 없군요.
낙양성은 사라지고 단지 그 모형만 남은 겁니까?
뤄양까지 오는 동안 우리 부부의 여정이 뒤죽박죽 되어버렸습니다.
원래의 계획은 시안을 거쳐 뤄양으로 오려했지만, 황성상부를 보느라 코스 이탈이 되기 시작했고
또 궈량촌을 가느라 옆길로 샜다가도 왔습니다.
내비게이션이 아니고 腦비게이션이 경로를 이탈했다고 다시 루트를 찍어야 한다고 난리 하네요.
그래서 처음 계획했던 뤄양에서의 여러 곳을 포기하고 일정도 다시 짜야하네요.
내일은 우선 롱먼(龍門 : 용문) 석굴부터 보렵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허난 성에 오면 식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걱정입니다.
이곳은 얼마 전 중국에서도 심각하게 알려진 하수구 식용유를 만들어 판 곳이지요.
그 사실을 세상에 알린 기자는 결국 결혼을 한 달 앞두고 살해되었습니다.
하수구에 모아놓은 폐식용유를 다시 걸러내고 정제하여 시중에 팔았다고 하더군요.
이런 대단한 기술을 지닌 중국은 앞으로 세상의 지도국이 되라는 것에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세상의 쓰레기를 모두 자원화할 수 있는 중국이 세상의 중심국으로 우뚝 선다는 일에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신기한 것은 가짜 달걀도 있고 가짜 분유도 있다고 하는데 그런 것을 만드는 기술과 능력이면
못할 게 없는 나라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만드는 비용이 더 들지 않을까요?
요즈음 중국 정부가 만리장성을 엿가락 늘이듯 한반도로 더 늘려 발표했다네요.
그러니 만리장성이 아니라 이만리 장성이 되는 건가요?
물론, 이 또한 동북공정의 일환일 테고 수, 당이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며 고구려에 당한 수치심을
중국은 아직도 느끼고 있다는 말인가요?
만리장성을 억지로 늘려 중국 정부에 무슨 도움이 될까요?
역사적으로 고구려를 폄훼해야만 중원의 권위가 서던 가요?
욕먹을 일만 있잖아요?
그 뒤에 숨은 흑심에는 장차 북한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려는 의도는 아닐까요?
칭기즈칸이 유럽까지 점령했으니 장성을 그곳까지 늘리면 어떨까요?
요즈음 대국이라는 중국이 하는 짓을 보면 천박하기 그지없습니다.
국자가 국 맛을 알지 못하듯 중국은 도리를 알지 못하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