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 여행기/시엠립 배낭여행

시엠립 시내를 둘러보자.

佳人 2009. 3. 9. 00:30

초보 배낭여행 9일째/11월 8일

 

이곳에 온 지 벌써 5일째.

3일간의 유적을 돌아보고 오늘 하루는 부담 없이 시내를 돌아본다.

간 밤에도 비가 내렸다.

아침에 일어나 하늘을 쳐다본다.

 

산들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린다.

이곳의 아침은 한국보다 빠르다.

우리나라보다는 일찍 해가 뜨고 일찍 해가 진다고 보면 되겠다.

먼동이 터오기 시작한다.

오랫만에 오늘은 걸어서만 시내를 다닐 예정이다.

 

오늘의 일정부터 살펴본다.

이곳을 佳人은 씨엠립이라고 했다.

현지인의 발음을 정확히 한국어로 옮기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일부는 시엠리아프,시엠리업 또는 시엠리읍이라고 쓰는 분도 계신다.

사실 시내라고 해 봐도 우리나라 읍 정도의 크기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러면 앞으로 우리나라 읍 정도의 크기니까 시엠리읍이라고 해야 하나?

하노이 시내도 모두 걸어서 다닌 우리 부부에게는 사실 다 돌아다녀도 반나절 꺼리다.

  

우선 숙소를 나와 방향을 앙코르 왓이 있는 북으로 튼다.

왓 마이라는 사찰을 찾아 가기 위해서다.

이 길을 따라 앙코르 왓 방향으로 가면 된다.

길거리에는 휘발류를 파는 가게나 노점상들이 보도를 막고 있다.

 

이 절은 그냥 작은 절이었으나 폴 포트 정권 시절 크메르 루주에 의해 희생된 억울한 자들의 유골을

모셔놓은 곳이다.

절 가운데에 위령탑처럼 만든 작은 탑 안에 희생자들의 유골.

최근에 당시의 뚜엉슬랭 교도소의 소장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다는 뉴스를 보았다.

당시 그곳에 수용당한 사람들은 모두 죽고 몇 명만이 목숨을 건졌단다.

그중 한 사람인 화가가 증인을 나와서 당시의 상황에 대한 증언을 하였단다.

그 사람은 폴 포트의 초상을 그렸기에 당시에 살아나서 증인으로 나올 수 있었단다.

 

"30년 동안 이날만을 기다렸지만 내가 받은 고통이 끝날지는 모르겠습니다." 

감옥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전직 화가였던 반 나트 씨는 이렇게 법정에서 말했단다.

법정에 선 당시 수용소 소장인 에아브는 허리가 굽은 초라한 노인에 불과했다.

그는 "희생자에게 용서를 구한다"라고 짤막한 말을 했단다.

 

폴 포트가 집권한 짧은 기간동안 200만이 넘는 사람들이 희생되었던 암울한 시기.

그러나 이곳은 규모가 크지는 않다,

전국적으로 희생된 억울한 유골들이 각 지역별로 이렇게 모셔진 장소이다.

 

우리에게는 킬링필드라는 영화로 비로소 이곳의 참혹한 사실이 알려졌다.

아픈 그들의 역사.

누구도 입을 열고 싶지 않는 역사의 죄악.

당시 인구의 30%에 가까운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한다.

서로가 가해자가 되고 희생자가 된 아픈 역사를 그들은 가슴에 묻고 살아간다.

 

돌아오는 길에 자야바르만 7세 아동병원을 지난다.

처음에 보고는 건물 위에 두상을 보고 뇌수술 전문 병원인지 알았다.

자야바르만 7세의 모습이란다.

 

이 병원 앞에는 아침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다.

무료로 운영하는 어린이 전문병원이라.

지금 캄보디아는 무척 열악한 의료시설로 많은 사람들이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단다.

 

의사이며 첼리스트 닥터 비트.

그의 무기는?

집도하는 칼이 아니라 첼로였다?

아니다.

제갈공명이 心外無刀라고 했지?

그는 칼을 들지 않고 오직 마음만으로 북벌을 꿈꾸었단다.

매주 화, 목 오후 7시 15분 무료입장에 에어컨 가동이라는 글이 제일 크게 쓰여 있다.

이 사람이 이 병원을 세운 의사로 어린이들을 위하여 무료로 의료봉사를 한다.

 

지나는 길에 앙코르 국립 박물관도 보인다.

무식한 佳人은 들어가 봐도 글도 모르고 내용도 모르니 그냥 통과한다. 

이럴때는 무식한 게 속상하다.

 

우리 부부는 이제 씨엠립 강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강가에는 투망질을 하는 부자가 보인다.

이곳에서 느낀점이지만 곳곳에 물 웅덩이가 있고 어김없이 물놀이를 하는 아이들이나 고기를 잡는

그런 사람들이 꼭 있다.

 

강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다. 

이곳에는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다.

내일부터 열리는 시엠립의 최대 축제에 대비하여 리허설이라도 하는 모양이다.

 

모녀도 아침 산책겸 구경이라도 나온 모양이다.

그런데 잠옷 패션이다.

이런 것도 이들 문화의 일부분이다.

전혀 이상할게 없다.

이상한 것은 이들을 이상하다고 하는 우리들이다.

그들을 이해 해야만 그들 곁으로 다가갈 수 있다.

옷 한 벌로 평생을 살아갈 수도 있으니 얼마나 실용적인 방법인가?

 

이들은 왜 잠옷바람으로 거리를 활보할까?

이들에게는 잠옷이란 바로 부의 상징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잠옷이 어디있고 외출복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잠옷을 입는 다는 일은 바로 옷을 여러 벌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을 과시하기 위하여 잠옷을 입고 자랑하기 위해 거리를 활보한다.

 

이곳 캄보디아에서 가장 큰 축제 중에 하나라는 "Water Festival"이 열린단다.

태국에는 송크란 축제가 있다는데 비슷한 축제인가?

이곳 시엠립 강에서 아마도 보트 경주가 열리는지 연습에 여념이 없다.

매년 11월 초에 3일간 열린다는 "본 옴 뚝"이라는 축제로 톤레삽 호수의 물길의 방향이 바뀌는 것을

축하하는 행사란다.

 

우리말로는 물과 달의 축제란다.

우기 때 톤레삽 호수로 메콩강의 물이 들어 오다가 이때쯤이면 건기로 바뀌며 톤레삽의 물이 반대로

톤레삽 강을 따라 메콩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서양인은 아예 윗옷을 벗고 자전거를 타기도 한다.

하긴 이곳 부조에 보면 남녀 모두 윗옷을 입은 사람들이 거의 없었으니 무슨 흉이 되겠는가.

그런데 같이 가는 여자 친구는 왜 벗지 않는겨?

오히려 옷을 입고 다니면 그게 흉이 되는 게야~

 

이들은 대중교통 수단이 없어 이런 트럭 위에 무더기로 타고 이동한다.

이게 바로 오픈카인가?

그들은 다른 동남아시아와 마찬가지로 주로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이용한다.

 

날렵하게 생긴 긴 배에 여러 명이 노를 저으니 순식간에 물살을 가르며 사라진다.

비록 부유한 국가의 사람들은 아닐지라도 이렇게 생활을 즐길 수 있으니 행복한 사람들이 아닐까?

 

그들이 사라진 강물은 다시 고요를 찾는다.

이 물길이 톤레삽으로 이어지고 메콩강으로 이어져 옛날 참파 왕국과의 대규모 전투가 벌어진 물길이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을 때는 핏빛으로 물들었으며 전투에서 죽은 병사들의 시신이 떠돌아다녔으리라.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강물은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다시 고요를 찾았으리라.

 

코끼리 조형물 위에 아이들이 놀이터인 양 한가롭게 놀고 있다.

이들에게는 모든 게 놀이터며 안식처이다.

 

또다시 다른 팀의 선수들이 연습에 여념이 없다.

구호에 맞추어 열심히 노를 젓는다.

 

이 강은 씨엠립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젖줄이요.

역사의 현장이며 동시에 안식처이다.

물은 이들의 생활 그 자체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배가 지나고 나면 강물은 다시 잔잔해진다.

전쟁도 끝나고 나면 흐르는 강물처럼 세상은 다시 고요를 찾는다.

자연은 늘 그대로이기를 바라지만 사람들 마음에만 파문이 인다.